영화 『무게』를 글로 읽어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의 무게를 짊어진 채 살아가고 있다. 그 무게를 누가 감히 잴 수 있을까. 영화 『무게』에서는 사회에서 격리된 채 어두운 그늘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약자와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태초부터 숨어 살아야 했던 그들은 어떤 사회적 시선을 받고 있을까. 삶의 무게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연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사람들이 괴물로 보든 벌레로 보든
무슨 상관이야? 살아야지”

영화 『무게』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사람들은 지하철을 타고 약속 장소로 향하고, 공원을 거닐고, 공연을 본다. 그러나 이 세상은 영화의 주인공 정씨가 살고 있는 세상이 아니다.
빅토르 위고의 장편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 이후 ‘꼽추’는 사회적 약자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됐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장의사 정씨 역시 등이 굽은 ‘꼽추’로 지하의 시체 안치실에 산다. 이곳에서 정씨는 각자 사연을 가진 시체들을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보이도록 복원한다. 이렇듯 정씨는 이 세계를 이루고 있던 한 개인들의 마지막 순간과 함께한다.
불편한 몸을 지닌 탓에 정씨는 스스로를 바깥세상과 차단한 채 시체 안치실에 딸린 쪽방에서 유일한 취미로 그림을 그린다. 정씨가 그리는 그림은 자신이 꿈꾸는 아름다운 인간의 나체이다. 또한 쪽방에서 움직이지 않는 자전거의 페달을 밟는 정씨의 모습은 어쩐지 고독함을 인정하고 있는 듯하다. 가끔씩 정씨는 양복을 차려입고 병원을 찾는데, 의사는 정씨에게 ‘병원오기 힘들 테니 약을 두 달 치 지어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의사의 배려의 이면에는 꼽추인 정씨의 병원 출입을 자제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인다.

 

▲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나비를 향해 팔을 뻗어 자신이 꿈꾸는 자유로운 삶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

“이렇게 더럽게 사는 거
이제 그만하고 싶어”

『무게』에서 사회의 소수자로 보이는 이는 정씨뿐만이 아니다. 고아원 출신인 정씨는 어린 시절 한 가정에 입양되는데, 이 가정에서 동배라는 정씨 또래의 남자 아이를 만나게 된다. 이 동배 역시 사회에 소속되지 못한다. 동배는 사춘기 시절 남자의 육체를 가진 자신의 몸속에 여자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성전환 수술을 받고자 한다. 그러나 동배의 엄마는 동배의 성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방관한다.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엄마와 경제적 여건으로 인해 성전환 수술을 받지 못한 동배는 자신의 남성성과 남근을 지닌 육체를 혐오하며 살아간다. 이런 동배가 할 수 있는 것은 때때로 여성 호르몬 주사를 맞는 것뿐이다. 남성 성기를 떼어내지 못한 동배는 여성과 남성의 몸이 섞인 기괴한 육체를 지닌 상태다. 옷을 수선하는 일을 하는 동배는 임산부의 옷 치수를 재던 도중 태아를 품고 있는 임산부의 배를 더듬으며, 자신이 꿈꾸는 여성으로서의 삶을 떠올리기도 한다. 동배가 희망하는 삶이란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평범한 삶이다. 그런 동배의 평범한 꿈이 우리의 눈시울을 붉히게 만든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벌레 같은 놈들이야.
네가 아니라고 그래도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봐”

정씨는 자주 옷을 입지 않은 맨몸의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추는 환상에 빠진다. 정씨는 그들과 땀을 흠뻑 쏟으며 춤을 추지만, 그것은 그저 환상일 뿐. 꿈에서 깨어나면 정씨는 다시 일상을 살아간다. 정씨는 또다시 혼자 시체를 닦고, 피 묻은 걸레를 빨며, 그림을 그린다. 그러던 어느 날 동배가 술에 잔뜩 취해 시체 안치실로 들어와 자신의 손에 불을 지른다. 동배는 정씨에게 ‘죽어버리고 다시 태어나면 혹시 알아? 아름다운 몸을 갖게 될지’라고 말한다. 이에 정씨는 ‘너만 힘들어? 나도 힘들어 뒈지려면 아무 데도 없는데 가서 뒈지던가, 왜 나한테 와서 지랄이야’라고 외치며 처음으로 동배에게 자신이 인내하고 있던 고통을 토로한다. 그동안 정씨는 동배만큼이나 고역스러운 생을 살았지만, 늘 괴로워하는 동배에게 ‘그래도 살아야지’라고 말해왔다. 고통스러운 삶이지만 살아있으니 살아야 한다는 정씨와 고통스러운 삶이기에 차라리 죽어버리고자 하는 동배.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오로지 괴로움의 연속일 뿐이라면 그것은 과연 살아있다고 볼 수 있을까. 감독은 이에 대해 냉소적인 대답을 내놓는다.
동배는 정씨의 시체안치실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토록 원했던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의 벗어난 죽음이지만, 이 죽음은 어쩐지 동배가 원하는 형태의 삶의 종착은 아닌 듯하다. 교통사고라는 외부적 요인으로 인한 죽음은, 죽음으로서 스스로 삶을 끝장내버리겠다는 동배의 욕망조차 거세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동배는 죽어버림으로써 고통에서는 벗어났지만, 그것은 고통으로부터의 일시적인 중단 상태일 뿐이다. 동배는 자신이 평생 짊어지고 있던 성 정체성 확립이라는 삶의 무게를 해소하지 못했다. 동배의 삶의 무게는 여전히 그 육체 안에 잠들어 있다.
정씨는 죽은 동배의 성기를 잘라주며 동배가 그토록 원하던 남성성으로부터의 작별을 이뤄준다. 그 후 정씨는 스스로 동배의 관 속으로 들어가 자살한다. 이것은 정씨가 관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으로 스스로를 가둠으로써, 결국 정씨 또한 삶의 무게를 여전히 짊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무게』는 정씨의 삶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벗어나고 싶었던 공간인 시체 안치실에 나비들이 떠도는 이미지를 끝으로 대장정의 막을 내린다.

 

▲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주인공이 자전거를 타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욕망을 보이고 있다.

‘사는 게 구질구질’하고 ‘차라리 죽어버리는 편이 나을 것’ 같은 삶을 살았던 정씨와 동배, 그리고 이들의 주변에서 살아가는 무수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은 태초부터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배척되고 외면 받아 왔다. 그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는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고약했기에, 그들은 이 세계에서 하루 더 사는 것이 아닌 죽음을 택했다. 그러나 욕망과 괴로움이 해소되지 못한 채 육체의 수명이 다해버린 것을 과연 진정으로 삶의 무게를 벗어던지는 것으로 볼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을 찾아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송민지 기자
treeflame@yonsei.ac.kr

<자료사진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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