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의 알파고가 바둑천재 이세돌과의 대국에서 4승 1패로 승리를 거두며 일주일간의 인간 대 인공지능의 경기가 마무리됐다. 바둑이 매우 정적인 스포츠임에도 불구하고 대국을 지켜보던 수많은 ‘인류’는 당혹감, 안타까움, 환성, 아쉬움 등 다양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 감정의 기저에는 분명 불안감이 자리잡고 있다. 지난 2500여 년 동안, 인류의 ‘낭만’을 간직해왔던 바둑이 고작 60년 나이의 인공지능이 펼친 바둑에 무릎을 꿇어야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알파고의 등장과 함께 20년 안에 인간 직업 절반이 사라질 것을 예고하는 기사가 쏟아진 것도 그런 불안감을 반영한다. 인공지능이 단순히 정보의 저장과 활용의 차원을 넘어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 믿어왔던 경험과 직관마저 소유하고 말았으니 이제 인간은 무엇으로 ‘생각하는 동물’임을 주장할 수 있는가? 알파고의 승리 이후 인간은 스스로 인간임을 입증해야 하는 실존적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이번 대국을 계기로 우리나라도 인간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는 노력에 시동을 걸고 있다. 정부에선 인공지능 개발에 과감한 연구비 투자를 약속하며 관련분야 육성을 진두지휘할 것임을 밝혔다. 때맞춰 우리대학교를 비롯해 서울대, 카이스트 등 주요 5개 대학들이 합심해 연구자들이 창의적이고 모험적인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연구업적 평가시스템을 개선할 것을 교육 관계부처들에 제안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비슷한 시기, 세계적인 과학계 석학들이 서울대 자연과학대 연구 경쟁력을 평가하면서 이곳 연구자들이 창의적이고 모험적인 연구보다는 정년보장을 위한 논문게재에만 열중한 탓에 “선구자가 아닌 추종자”에 그칠 것이라 언급한 사실도 대학가는 물론 교육당국에 현 대학교육의 문제에 경종을 울리는 데 한 몫 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인공지능 앞에 인간이 갈수록 겸손해지는 이 시대에 대학의 연구자들이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풍토 없이는 학생들이 화석화된 지식만을 습득하게 마련이기에 연구의 문제는 곧 교육의 문제와 직결된다.

하지만 알파고의 등장과 함께 대학과 교육당국이 던지고 있는 자성, 개혁의 목소리가 결국 추종자의 위치에 익숙한 우리가 또 하나의 알파고를 만들 수 있느냐의 문제로 귀결되는 건 아닌지 염려스럽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교육 및 산업계 는 알파고가 바둑을 학습한 방법, 즉 최소한의 시간으로 이미 만들어진 기보를 가능한 한 많이 습득함으로써 고수들의 실력을 따라잡고 급기야 능가하는 전략을 써왔던 것이 아니었던가. 인간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미명하에 바둑천재 이세돌의 창의력과 직관력에 관심을 두기보단 그를 이긴 알파고를 배우고 닮고자 노력해온 것은 아닌가. 그동안 세계적 수준에 올랐다 자평하는 우리의 대학과 기업은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길 때의 수를 두며 오늘에 이르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학교를 중퇴한 이세돌처럼 창의적 사고를 하며 생각할 줄 아는 인간보다는 무지막지한 주입식학습, 반복학습, 모방학습에 능한 알파고가 어쩌면 우리의 자화상에 더 가까울 수 있기에.

문제는 알파고가 바둑천재를 넘어선 지금부터다. 알파고의 개발자 데미스 하사비스는 이번 대국은 개발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알파고의 약점을 파악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창조자조차도 피조물의 능력을 온전히 알지 못하니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알리가 만무하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처럼 창조자를 죽음으로 이끄는 터미네이터류의 피조물이 아니라면, 바둑만을 기능적으로 학습하며 일생 단 두 번의 패배만을 ‘입력’한 알파고는 또 다른 인간 이세돌이 없는 한 스스로를 혁신할 길을 잃고 만다. 대학교육 역시 20년 내 알파고가 대체할 기술 및 전문직 양성에 미래를 맡기기보단 이세돌처럼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을 기르는 데 역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인간에게 어려운 일은 로봇에게는 쉽고, 인간에게 쉬운 일이 로봇에게는 어렵다.” 카네기멜론대 교수인 한스 모라벡의 역설이라 알려진 이 말은 알파고의 시대에 대학교육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해준다. 기계적 냉정을 인간적 열정으로 바꿀 수 있는 교육, 살아있음을 느끼고 살아갈 가치를 함께 만들어 낼 수 있는 인간중심의 교육이 아니겠는가.

지금까지의 인류역사가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조물주의 존재를 입증하려 노력해 왔던 시간이었다면, 이제는 창조주 인간이 피조물 인공지능에게 스스로 인간임을 입증해야 할 시간이 도래한 것이라면 과언일까? 칼을 든 솔로몬 왕이 만약 알파고의 지혜를 가졌다면 한 아기를 두고 서로 자신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두 여인 앞에서 분명 냉정한 판결을 내렸을 것이지만 아기는 살아남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대학교육은 창조주가 자신의 피조물을 모방하는 굴욕에 익숙해지기보다는, 생명을 중시하고 인간가치의 실현에 중점을 두어 ‘계산’이 아니라 ‘생각’하는 인간의 교육을 먼 미래를 내다보며 항상 염두에 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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