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학력 백수 334만 명,” “임금격차 최악,” “소비자물가 3년 이래 최고……”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펼칠 때마다 신문에는 자극적인 단어들이 즐비하다. 예전에는 화가 나기도, 우울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감정을 크게 이입하지 않는다. 가끔 현실에 무감각해진 내 모습에 화가 나는 정도로만.

개강 후 미시경제학에서 만난 동기생들에게 요즘 경제에 대한 생각을 물었을 때, 그 대답들에는 공통적으로 ‘자유’가 포함돼 있었다. 지금 나는 기고하기 위해 썼던 글을 모두 다 지우고,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리가 그토록 지겹게 들어온 ‘자유,’ 정확히 말하자면 신자유주의는 탐욕의 자유주의라기보다는 무질서한 시장 속 질서와 도덕성을 이야기하는 이론이다. 그 시작을 보자면,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국부론에서부터 시장경제의 성공조건으로는 사실 ‘윤리’를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대공황 이후 등장 이래 사회적 변화로부터 인류를 철저하게 비윤리적으로 배신해왔다. 1970년대 두 번의 유류파동부터 1980년대 남미 대외채무위기,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끝으로 이 경제에서 윤리는 사라졌다.

이후 신자유주의의 모순은 계속돼왔다. 사유재산과 자유방임주의를 고수한다면서 카셰어링(car sharing) 같은 공유경제가 일상 속에 존재하고, 이윤추구가 제1원칙인 사기업의 사회적 의무를 거리낌없이 이야기하며, 네트워크나 신뢰와 같은 무형의 사회적 자본의 중요성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경제 사회가 변화하지 못하는 사이, 작금의 기술은 너무도 빠른 속도로 진보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사람과 바둑을 두고, 휴대전화로 결제를 하며, 무인자동차 상용화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인공지능을 개발함과 동시에 산업수요를 맞춘다는 미명아래 우리 대학교육은 인문·사회과학을 배척하는 정책에 부합하려 노력하고 있고, 핀테크의 등장과 마이너스 금리를 시작으로 가상화폐의 시대로 걸어가는 와중에 개인정보의 뒷문을 열어달라는 정부와 공존하고 있으며, 지역별 자급 구조를 만들기 희망하며 이름마저 원대한 창조경제혁신센터를 세우면서도 창업과 재기에 대한 문턱이 너무나도 높다. 다시 한 번, 우리 사회가 이러한 변화를 거부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 거부에 대한 일환으로 지난 8년간의 화폐전쟁의 결과가 어떠한가? 마이너스 금리가 화폐경제의 종식을 알리고 있고, 유럽이나 중국은 물론 신흥경제의 국가 및 가계채무로 인한 또 다른 경제위기를 매일같이 전문가들과 외신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또 한번의 배신이 임박했다.

국가도, 시장경제도 한계치에 도달했다.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이야기하는 사회주의혁명은 현대사회의 조건에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많은 나라들을 통해 확인했고, 존 케인스(John M. Keynes) 또한 틀렸음을 지금의 사회가 방증한다. ‘우리는 앞으로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길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본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가 우리가 매일 무심하게 접하는 현실을 직접 반영하거나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당장의 청년문제는 ‘자유’의 기틀 속 1997년 이래 20년간 고착된 고용 불균형과 임금격차가 만들어낸 소득불균형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꿈을 잃기엔,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삼포세대이기를 자처하기에는 살아갈 날들이 너무 길지 않은가? 우리의 세상을 함께 고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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