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유산, 성신교린(誠信交隣)의 가치

최초 한국과 일본의 평화를 위해 문화사절단 역할을 했던 조선통신사(아래 통신사)와 관련된 자료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공동 등재하려는 한·일 양국의 움직임이 눈길을 끌고 있다. 한·일 양국은 통신사와 관련된 그림, 글 등의 기록물 약 300여 점을 심의 대상에 신청할 것을 합의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은 유네스코가 세계의 귀중한 기록을 보존하기 위해 선정하는 문화유산이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된 것으로는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네덜란드의 안네 프랑크의 일기 등이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훈민정음과 난중일기 등이 선정된 바가 있다. 인류 모두의 자산으로 보호하고 계승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져 선정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이에 도전하는 통신사는 무엇이며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을까.

임진왜란 이후 재개된 교류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통신사는 1607년에 그 역사가 시작되지만 조선과 일본의 교류는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 전 조선과 일본은 통신사 외에도 통신관, 회례사 등의 이름으로 서로 왕래가 많았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18회, 일본에서 조선으로 71회나 되니 교류가 잦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선과 일본의 국교는 단절됐다. 이후 조선 정복을 꾀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유재란* 중 사망하며 일본은 정권 교체의 혼란과 내전을 겪는다. 혼란 속에서 최고 실력자 자리에 오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야욕으로 일그러진 조선과의 관계 회복을 꾀한다. 이는 청 다음으로 문화가 발달한 조선을 통해 선진 문물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에 일본은 1600년 조선에 화호요청을 보내게 된다. 이때, 도쿠가와는 이전 조선 침략을 주도했던 도요토미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강조하고, 임진왜란 당시 생포됐던 조선 피로인**을 송환시키며 계속해서 교섭을 요청했다. 계속된 일본의 요청에 조선은 1604년, ‘탐적사’라는 이름으로 사명대사를 파견해 일본의 동정을 살피게끔 했다. 이후 조선은 1606년 ‘일본 국왕’이라는 칭호로 일본이 조선에 국서를 보내는 등의 조건을 쓰시마를 통해 일본에게 전달했고 1607년, 마침내 조선사절단의 파견으로 조선과 일본의 교류가 공식적으로 재개됐다.

‘통신’의 시작

그러나 이때 파견된 사절단은 ‘통신사’라는 이름 대신 ‘회답겸쇄환사’라고 불렸다. 당시 조선은 일본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의를 바탕으로 교류한다’는 의미인 ‘통신(通信)’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세 차례에 걸쳐 회답겸쇄환사가 파견된 후 본격적인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재개된다. 이때부터는 ‘통신사’라는 이름의 사절단이 파견되기 시작했으며 반대로 일본에서 조선으로 ‘일본 국왕사’라는 이름의 사절단이 파견되기도 했다.

통신사는 300~500명 규모로 구성된 공식 외교사절단으로서 국빈대접을 받으며 일본인들의 환영 속에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의 주된 임무는 때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이전의 통신사는 노략질과 약탈을 일삼는 왜구에 대한 제지를 요구하고자 했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양국 간의 관계회복과 피로인 송환에 초점을 맞췄다. 그 이후에는 새로운 막부 장군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형식적인 방문으로 굳어졌다.

통신사는 총책임자인 삼사가 인솔했는데, 정사라고도 불리는 이 직책은 왕의 국서를 전달하고 일본까지의 고된 여정을 책임지는 중요한 자리였다. 이에 학식뿐 아니라 인품과 넓은 경험까지 갖춘 자가 선발됐으며 이들은 부사의 보좌를 받았다. 이외에도 여정의 기록을 담당하는 종사관, 각종 글과 관련된 업무를 수행했던 제술관, 사자관, 서기를 비롯해 역과 출신의 정식통역관 통사와 오늘날의 가이드 역할을 했던 훈도, 행진에 필요한 음악을 연주하는 악대, 통신사의 여정이나 각종 의례를 그림으로 그리는 영원, 통신사를 호위하는 군관 및 각종 허드렛일과 심부름을 담당하던 소동 등이 통신사의 일원이었다. 한편, 일본의 요청으로 파견된 이들도 있었는데, 일본은 특히 조선의 발달된 의술에 관심을 보이며 통신사와 함께 의원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다. 또한, 일본은 마상재***에 큰 흥미를 보여 사절단과 함께 2명의 마상재인을 파견했다고 한다.

▲ 조선통신사 내조도

400년 전 일본에 분 한류열풍

조선은 당시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화가 잘 발달돼 있었는데 통신사는 이러한 조선의 문화를 일본에 소개하는 문화사절단의 역할을 했다. 21세기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전 세계가 들썩였던 것처럼 그때 당시 통신사를 통해 들어오는 조선의 문화에 일본 열도는 열광했다. 통신사가 일본에 도착하는 날이면 사람들이 모두 나와 크게 환영하며 잔치를 열었다. 통신사의 뛰어난 문인들에게는 시편을 써달라는 요청이 종종 들어왔는데, 통신사 문인들의 작품만 따로 엮어 출판한 책이 나올 정도였다는 기록이 있으니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영원들의 그림도 인기가 많았는데, 달마도를 그린 것으로 유명한 김명국은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그림을 그려달라는 요청이 쇄도해 팔이 너무 아파 울음을 머금었던 적도 있다고 한다. 그림과 서예 외에도 통신사를 통해 일본에 전해진 문화로는 조선의 가마와 당인의 춤이 있다. 반대로 일본으로부터 새로 조선에 소개된 것들도 있었는데 빈곤을 해결하는 열쇠가 된 고구마와 오늘날의 빨간 김치를 만든 고추가 바로 그것이다.

세계 평화에 기여할 ‘성신’의 정신

▲ 지도로 표현한 조선통신사의 여정

통신사는 당시 수도였던 한양을 출발해 육로로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일본은 역시 부산을 거쳐 한양으로 향했다. 양국의 교류의 거점지역이었던 부산에는 왜관****이 설치돼 있었는데 훗날 이곳에는 통신사의 역관으로 파견됐던 관료 현덕윤이 부임하게 된다. 현덕윤은 이 왜관에 조선과 일본 간의 교린의 길은 ‘성신(誠信)’이라는 뜻으로 ‘성신당’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 역관 아메노모리 호슈는 크게 감탄하며 조선과 교류할 때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해 『교린제성』이라는 이름의 책을 썼다. 이 책의 마지막 조항 역시 ‘성신교린’이다. 그렇다면 현덕윤과 호슈가 주장한 ‘성신’이란 무엇일까. 성신은 진실한 마음으로 신뢰함을 뜻한다. 즉, 양국이 교류를 함에 있어 서로 속임이 없고 다투지 않으며 진실한 신뢰를 바탕으로 통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 간에 이루어진 교류가 세계적인 가치가 있다는 점을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통신사가 200년 동안 열두 차례 일본을 방문한 시기엔 양국 간에 전례 없는 평화가 유지됐다. 신의를 바탕으로 진실한 교류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문화를 주고받으며 교류하는 것. 끊임없이 발생하는 국제분쟁과 충돌의 해답인 평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가치인 것이다. 실제 동북아시아문화학회 남송우 회장은 통신사의 유네스코 등재를 위한 심포지엄에서 ‘조선통신사는 과거 역사로 끝난 게 아니라 현재와 미래, 나아가 세계 평화를 위한 모델이 될 수 있다’며 ‘한·일 갈등을 근원적으로 해소할 민간 교류의 매개체이면서 양국이 공유한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역사 문화 콘텐츠’라고 밝힌 바 있다. 일본 측의 입장도 이와 같았다. 규슈대학 아시아 태평양 미래연구센터 마츠바라 다카토시 센터장은 ‘통신사는 정치 쇼가 아닌 실질적인 문화 교류의 장이었다’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통신사의 정신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

통신사를 둘러싼 문제

현재 부산문화재단을 중심으로 한 한국과, 쓰시마 지방위원과 나가사키 현 등 여러 지방의 후원을 받는 일본이 공동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통신사의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유네스코 등재를 위한 대규모 투자에 비해 현저히 부족한 한국 측의 관심과 지원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에 부산문화재단 측은 ‘조선통신사 축제’ 등의 행사를 개최해 국민들의 관심을 높이고 지원 확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편 더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통신사가 조선의 선진적 면모, 조선 문화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임을 강조하며 일방적인 해석을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조선통신사학회 강대민 학회장은 지난 5월 8일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에서 주최한 시민문화강좌에서 ‘혹시 한류를 일방적인 한국 문화의 일본 전수라는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그 한류는 오래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국제성을 상실할 것이다’고 말하며 ‘조선 역시 통신사를 통해 일본 문화의 자극을 받으며 고양된 문화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강 학회장은 이어 ‘통신사 문제를 고민할 때 가져야 할 중요한 가치는 단순한 자존심이나 문화적 우월감의 재생산이 아님’을 강조했다. 발달된 조선의 문화가 통신사를 통해 일본에 소개된 것은 사실이지만 통신사의 의의는 조선의 선진문화가 아닌 조선과 일본의 교류를 통한 발전과 공존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해 세계인과 공유하고 함께 계승하려는 가치 역시 ‘통신’ 그 자체여야 한다.

200여 년 동안 조선과 일본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 통신사.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상호존중과 신뢰의 ‘성신교린’이 아니었을까. 갈등이 넘쳐나는 21세기에 우리에게 성신교린의 자세가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루빨리 통신사에 대한 우리 국민의 관심이 높아지고 우월감에서 벗어난 해석을 통해 통신사가 한·일 양국의 유산에서 세계인 모두의 소중한 유산으로 거듭나길 기대해본다.

*정유재란 : 임진왜란 기간 중 1597년에 있던 2차 침략전쟁.
**피로인 : 적에게 포로로 잡힌 사람.
***마상재 : 기병이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무예로 임진왜란 때 처음 시작됨.
****왜관 : 조선시대 일본인이 조선에서 통상을 하던 무역처.

 

글 서형원 기자
ssyhw35@yonsei.ac.kr
<자료사진 고베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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