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세춘추 사진부는 108기를 마지막으로 사라졌었다.

 
#2 하지만 사진의 질 하락과 카메라 관리 미흡으로 인해 사진부의 필요성이 다시 대두됐고, 사진부는 내가 수습기자로 들어온 시기에 신설됐다.
 
#3 나는 연세춘추에 글을 쓰러 왔었고, 부서배정을 앞둔 당시 사진부의 존재 이유와 존폐 여부에 대한 선배들의 거리낌 없는 험담을 받아들였다.
 
#4 그리고 난 사진부의 첫 전임기자로 배정됐다. 신설된 부서라 선배도 없었고 부장은 타 부서를 겸임하고 있었다. 부서 배정을 축하하는 뒤풀이 자리에서 어린 마음에 서러운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5 시작은 당연히 절망적이었다. 생전 카메라를 다뤄본 적도 없는 두 명의 부기자가 신촌캠과 국제캠을 오가며 사진을 찍어댔다. 따끔하게 혼내줄 선배도, 열정 넘치는 동기도, 숨 막힐 듯한 매뉴얼도 없었다. 글에 나름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 나에겐 죽은 나날들이었다.
 
#6 연세춘추에는 ‘정기자 매너리즘’이라는 말이 있다. 기자 생활 3학기 째 접어들면 자신의 일에 한계나 싫증을 느껴 만사가 귀찮아지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내 정기자 생활은 조금 달랐다. 우선 그 전 학기에 아무것도 모르고 쏘다닌 결과 사진 실력이 늘었다. 카메라 장비도 그 즈음 강화돼 사진 찍는 맛이 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같이하고 싶은 사람들이 생겼다. 무책임했던 부기자 때와는 다르게 맡지 않아도 될 일까지 도맡아 하며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7 사진부장을 하기까지 고민이 없던 것은 아니다. 사실 결과 발표 직전까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학생 신분으로서, 부모님의 아들로서, 그리고 아직 미숙한 사람으로서 많이 주저했다. ‘애증’이라는 단어를 잘 쓰지 않는 편이지만 사진부엔 아낌없이 쓰고 싶다. 내가 첫 전임기자였던 것이 너무 싫었지만 내가 첫 전임기자이기 때문에 사진부장을 맡고 싶었다. 겸임부장으로 점철돼있던 사진부는 싫었다.
 
#8 시간이 흘러, 사진부에 오고 싶지 않아 했던 수습기자들을 내 손으로 직접 데려오게 됐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고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른다지만 참 미안했다. 하지만 미안함보다는 그만큼 잘해주겠다는 마음이 더 컸고 애초에 정말 원하던 좋은 기자들을 데려와 기뻤다. 선배가 없어 서러웠던 그 날의 나를 떠올리니 감회가 남달랐다. 사실 상대적으로 인원이 적은 사진부에 처음 들어온 기자들은 적적했을 수도 있지만. 
 
#9 돌이켜 생각해보니 좋은 부장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 꼼꼼하지 못한 성격이 좋은 영향을 줬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나이차이도 꽤 있어 나를 잘 따라준 기자들에게 항상 고마웠다. 부끄럽지만 책임감보다는 고마움을 더 많이 느껴왔다.
 
#10 이렇게 마치고 나가면 딱 좋으련만, 이 기자들을 한 학기나 더 보게 됐다. 휘청거리던 사진부가 여기까지 오기까지, 가끔은 사진보단 기억들이 더 생생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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