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영준 문학상(소설 분야) 당선작 ] 

갱도

박종성(문정·12)

 

갱도를 지나니 아직 밤이었다. 종일 밤을 걸었는데도, 밤은 아직도 떠나지 않고 거기 남아있었다. 먹먹한 어둠이 구정물처럼 흘러내렸다. “너는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어.” 그는 아직 갱도 안에 있었다. 갱도를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갱도 안이었다. 끈끈한 어둠이 뒤엉킨 흙무지와 돌무더기를 헤치며 벽을 기어올랐다. 아치형으로 뚫린 구덩이 너머로 고개를 들이밀자 천장에서부터 천천히 세상의 모습이 드리워졌다. “여전히 다른 갱도에 불과해.” 아무렴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눈앞에 드러난 잘게 부서진 도시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도시엔 어느 누구도 살지 않았다. 그는 방독면을 뒤집어쓰고 모래와 잿더미를 헤치며 사냥감을 살피듯 실제론 사냥감이겠지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하 공기를 한참 들이마신 목구멍이 부식된 수도관처럼 거칠거칠했다. 땅쥐처럼 기던 몸은 땅위에서도 구부정하게 굽었다. 남자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스팔트 도로는 가뭄이 난 것처럼 갈기갈기 찢어져있었다. 도로엔 무너진 바닥이 많았다. 그는 걷는 것이 익숙하지 않는 사람처럼 구멍에 발을 계속 헛디뎠다. 어둠이 그의 어깨에 무겁게 들러붙었다. 걸음은 납처럼 끌려왔다. 남자는 커다란 자루가 실린 구루마를 끌고 있었다.

모든 게 괜찮을 거야.

그는 까슬까슬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거뭇거뭇한 태양은 자신의 치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묵인해주곤 했다. 땅 위를 떠나 어서 쉴 곳을 찾아야했다. 그는 비쩍 마른 손가락으로 손등을 두드렸다. 오래 묵은 해골바가지를 건드리는 것처럼 서늘하고 건조한 감각이 느껴졌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 사이에는 땅굴들이 숨어있었다. 이리저리 떠도는 객들의 보금자리. 거기엔 가끔 선객이 먼저 와서 쉬는 경우도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합석은 없어.” 누군가 있다면, 그땐 누군가를 없어지게 만드는 것이 새로운 손님의 역할이었다. 그는 그런 일을 제법 했다. 처음엔 좀 어려웠지만, 이제는 익숙하게 해낼 수 있었다. 그는 발코로 흙무더기를 내리쳤다. 몇 가닥의 어둠이 구덩이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대답은 없었다. 다시 흙바닥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었다. 그는 구덩이 안으로 조금씩 발을 들이밀었다.

옳지, 겁먹지 마라.

남자는 품안을 쓰다듬었다. 코트 너머로 울룩불룩한 감촉이 느껴졌다. 차갑고 딱딱한 감촉이었다. 그는 누군가 훔쳐가지 않을까 겁먹은 것처럼 그 감촉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의 몸이 이윽고 구덩이 너머로 사라졌다. 구덩이 안은 하수구처럼 습습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를 땅굴에선 누군가의 곰팡이 슨 온기가 느껴졌다. 그는 넝마자루를 꼭 끌어안고 몸을 누였다.

감은 눈꺼풀 너머 회중시계가 아른거렸다. 회중시계는 오래된 공장처럼 쉬지 않고 째깍째깍 소음을 만들어냈다. 귓구멍을 막아도 소리는 결석처럼 남았다. 기억은 언젠가부터 태엽 감기는 소리에 뒤덮이고 있었다. 그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그는 밧줄로 꽁꽁 묶어두고 방아쇠를 당기는 모습을 상상했다. 총소리가 들렸다. 시계 소음이 잦아들었다. 땅속이 고요해졌다.

점점 기억이 흐릿해지는 거 같아.

그는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며 입을 실룩거렸다.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도 없겠지." 목소리가 그렇게 말했다.

 

 

*

 

잠결엔 여자가 다녀갔다.

그는 바짝 마른 입안을 훑으며 눈을 떴다. 굴속에서의 하루는 아늑했다. 고요한 것이 마치 무덤 같았다. 남자가 자는 동안 죽은 먼지는 관처럼 몸을 뒤덮었다. 눈자위 쪽은 누가 동공을 가지고 놀다가 다시 끼워놓은 것처럼 쓰라렸다. 혓바닥 위엔 잿가루처럼 텁텁한 감촉이 쌓였다. 그는 자신이 잠든 사이에 교체되었다고 생각했다. 매번 잠은 그를 무언가 다른, 좀 더 노쇠한 존재로 바꾸어놓았다. 그는 버릇처럼 가슴 부근을 매만지곤, 코트 너머 두터운 물체의 감촉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아, 모든 게 괜찮아.

그럴 리는 없지.”

그가 가끔 뻔한 거짓을 말하는 건 온전히 그의 탓은 아니었다.

거짓 아가씨는 그의 종자들 중 한 명이었다. 아가씨는 그의 안에서 살고 있었다. 그녀는 이름처럼 거짓말 하는 걸 좋아했다. 아가씨는 기회를 엿보다 가끔 그의 밖으로 불쑥 밖으로 나왔다. 아가씨는 세상에 거짓말이 많아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거짓 아가씨는 희망 아가씨와 함께였다. 희망 아가씨는 희망적인 것을 좋아했다. 그가 희망을 가질만한 상황이면, 아가씨는 언제나 희망을 치마폭에 숨기곤 사라졌다. 따라서 무언가 희망적인 광경이 있어도 희망은 줄곧 사라져버렸다. 그에게 남겨진 건 살코기가 뜯어져 뼈다귀처럼 남겨진 거짓말밖에 없었다. 거짓 아가씨와 희망 아가씨는 그런 식으로 늘 함께였다. 희망은 늘 거짓이 되었다.

굴을 빠져나온 그는 손전등으로 폐허 쪽을 비추었다. 방독면의 렌즈 너머엔 어둠과 먼지와 모래알갱이밖에 없었다. 그는 렌즈를 비비며 눈을 끔뻑거렸다. 그가 간헐적인 숨을 쉴 때마다 호흡 너머로 모래가 불빛처럼 빛났다. 손전등의 조각빛은 곧 막다른 골목에 부딪혔다. 그는 손잡이를 돌려 불빛을 자신의 얼굴에다 천천히 들이댔다. 그는 입가에 닿은 불빛을 갈급하게 마시고 삼켰다. 불빛이 식도를 넘어 내장까지 훌훌 흘러들어갔다.

도시는 쓰레기와 악취로 뒤덮여 있었다. 무너진 마천루들은 고슴도치처럼 몸을 웅크리고 삐죽하게 튀어나온 철근들을 내밀었다. 눅진하게 들러붙은 돌가루에 고철들은 원래의 형태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쓸 만한 물건 따위는 없을 거야.” 그는 말없이 부서진 콘크리트 안쪽을 헤집었다. 빌딩과 도로의 잔재를 뒤지다보면 재질을 알 수 없는 바람이 그를 덮쳐왔다. 방독면은 오래되었고 정화통은 망가져있었다. 남자는 코끝을 찡그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두통이 심해졌다. 구루마에 허리를 기대고선 발뒤꿈치로 땅을 깊게 눌렀다. 눈앞에 다시 회중시계가 아른거렸다. 날카로운 초침이 그가 한 호흡 내뱉을 때마다 두개골을 흔들고 있었다.

그녀를 찾아야 해.

시체도 남아있지 않을걸.” 그는 자신이 너무 많은 것들에 지배당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속한 종자들은 주인인 그를 비웃고 욕보였다.

불쌍한 그녀. 그녀를 찾아야 해.

갑작스런 인기척에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철조망이 우그러진 길 한쪽에서 트럭 한 대가 산산이 부서진 채로 누워있었다. 트럭의 일부는 방수포로 덮여있었다. 불길에 그슬려 바닥을 뒹구는 보닛 옆엔 타이어 바퀴 두어 개가 굴러다녔다. 어두워서 더는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어설픈 실루엣이 그가 짐작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였다. 그는 손전등으로 펑크가 난 고무 누더기를 쿡쿡 쑤셨다. 불빛을 지렛대로 삼아 잔해의 한 가운데를 찌르며 어둠을 살살 들어올렸다. 그때 깜빡하며 점멸하던 손전등이 툭 꺼졌다. 그는 자맥질하듯 허우적거리다가 부러진 가로등에 발을 헛디뎌 중심을 잃고 말았다. 그가 다시 일어서기 전에, 트럭의 잔해를 덮은 방수포가 한바탕 꿈틀거렸다.

그는 코트를 뒤지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낡은 권총이었다. 방수포 너머를 향해 날카로운 가늠쇠가 겨누어졌다. 새까만 총신은 빗금 투성이었지만 매끈하게 닦여있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걱정할 거 없어. “뭐가?” 우리는 세상을 받치고 있어.

그거 무너진 지 오래지.

너덜너덜해진 방수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방아쇠에 힘을 주었다. 이윽고 방수포에서 포유류가 새끼를 치는 것처럼 조그만 덩어리가 쑥하고 나왔다. 넝마였다. 찢어진 넝마 틈새로 어둡고 더러운 눈동자가 희끄무레하게 비추어졌다. 눈동자 아래가 벌름거렸다. 몸이 들썩거렸다. 넝마는 그를 보며 손가락을 귀에 빙글빙글 돌리곤 키득거리고 있었다.

당장 꺼져.

그가 총구를 흔들었다.

꺼져.

넝마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가 살며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자리엔 벌써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 문제없어, 늘 그렇듯.

그는 맥 빠진 목소리로 말하곤 부르튼 손으로 총신을 쓰다듬었다. 총의 표면은 거칠고 딱딱하고 굽어있었다. 손가락이 우둘투둘한 굴곡을 매만졌다. 살갗에 굴곡의 선이 남았다.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회중시계를 박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권총으로 시계의 심장을 하나씩 겨냥하고 있었다.

"죽였어야 했어." 그는 답하지 않았다. "늘 그런 식이지." 그는 사냥감에게 늘 필요 이상의 자비를 베풀었다. 관용은 번번이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그러나 수어번의 위기 속에서도 끝까지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적이 적지 않았다.

그는 트럭을 덮은 방수포를 길게 끌어당겼다. 방수포의 귀퉁이를 짜임새 있게 묶고서, 철조망 근처에 너부러진 폐품들을 하나하나 주워 담았다. 깨진 사이드 미러를 수거했다. 영원히 843분을 가리키고 있을 자명종 시계도 수거했다. 핸들도 수거했다. 시트도 수거했다. 방수포의 옆구리가 입 안에 급하게 음식을 쑤셔 넣은 것처럼 울룩불룩해지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깨에 방수포를 메고 다시 길을 걸었다.

 

*

 

그는 여자를 찾고 있었다.

그가 잠들었을 때 여자는 그의 곁에 머물다갔다. 여자는 오래되어 썩은 나무를 만지는 것처럼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손길은 차갑고 건조하다. 그는 허물을 벗는 것처럼 자신이 한 겹씩 벗겨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자는 자신과 자신이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 감각에 숨을 들이킨다. 몸을 발버둥 친다. 여자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가 않는다. 귀밑머리나 귓불이 그의 시선을 살며시 스쳐지나갔다. 시선을 유지하는 것도 잠깐이었다. 그녀의 손길이 이끄는 부분마다 그는 서서히 흩어져가고 있었다. 그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의식과도 같다고 느꼈다. 그녀는 제사장이었고 그는 제물이었다. 자신이 모래바람처럼 스르륵 사라지는 최후의 순간에 비로소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러나 여자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그가 깨어날 때쯤이면 여자는 거짓말처럼 떠나가는 중이었다. 여자는 어느새 스무 발자국도 넘게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는 눈으로 여자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몸은 밧줄로 묶어놓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늘은 달랐다. 잠결 속에서 여자는 죽고 말았다. 그를 찾아온 여자는 몇 걸음 가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그녀가 쓰러진 자리에는 샘처럼 피가 솟았다. 그녀는 다시 일어나 비틀거리며 걸었다. 그는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그대로 저 낭떠러지 너머로 떨어져버렸다. “굴속에서 낭떠러지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허겁지겁 잠에서 깨어났지만 핏자국은 이미 지워져있었다. 몰칵몰칵 쏟아져 모래를 물들였던 붉은 색조는 사라졌다. 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죽지 않았을 거야.

기회를 엿보던 희망 아가씨가 입을 열었다. 그는 그게 거짓이 아니기를 빌었다.

그는 좁은 구덩이에서 메마른 몸을 누이고 여장을 살폈다. 벌려진 손가락이 자루를 뒤적였다. 사람 하나와 자루 하나. 그게 다였다. 여기까지 들고 온 것들이고 앞으로도 들고 갈 것들이었다. 그는 방독면을 쓰고서 거적을 제비초리에서부터 턱밑까지 묶어 고정시켰다. 거적은 숨을 쉴 때마다 흔들렸다. 거친 날숨이 뜨겁고 김 찬 먼지바람으로 변했다. 동공 앞에서 회중시계가 아른거렸다. 표면이 마모되고 유리 덮개가 부서졌지만 시계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시계의 피부 너머로 조그만 톱니바퀴들이 세세하게 움직였다. 태엽이 돌아가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는 손을 휘휘 저었다. 그리곤 다시 회중시계의 이음새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상상을 해냈다. 하지만 소음은 여전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좀 더 멀리 있는 것들을 생각하려 애썼다. 그는 언젠가 보았던 호수를 떠올렸다. 거기서 잠시 머물고 있을 때는 사정이 좀 더 나았다. “아니, 거기서는 더 최악이었지.” 거기엔 좀 따뜻한 물이 있었다. 구정물이었지만 그렇게 비리거나 독하지도 않았다. 그는 페트병에 담아 그 물들을 오래간 마셨다. 그 이후로는 제대로 목을 축여본 기억이 없었다.

어느새 초침 소리는 사그라들어 있었다. 그는 억눌린 숨을 삼키듯 이상한 소리로 웃어보였다.

 

*

 

그는 담벼락이 무너진 곳에서 멈춰 선다. 그는 방향을 가늠하고 있다. 회중시계의 초침이 나침반 역할을 해준다. 많은 경우에 그는 무언가를 스스로 해낼 필요가 없다. “저쪽, 저쪽이야.” 그가 잊은 것들을 그의 종자들은 잘 기억하고 있었다. “난 네 종자가 아냐.” 그도 담벼락의 끄트머리에 도달해서는 길을 기억해냈다. 길은 도시와 이어져있었다. 도시는 무한했다. 발 닿는 전부가 도시였다. 종일 걸어도 도시의 시체 속 무너진 철근들이 기생충처럼 꿈틀거리며 다시 도시를 재생시키고 있었다. 밤의 도시, 악취의 도시, 먼지의 도시. 담벼락에서는 동물의 사체를 흙과 둥글게 섞어 뭉쳐둔 것처럼 썩은 냄새가 났다. 한 두 번의 향만으로도 언제든 이 냄새를 기억 속에서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담벼락 너머에서 무언가 반짝거리는 것을 본다. “저기 무언가가 있어.”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방금 들려온 목소리는 분명 희망 아가씨였다.

"너는 늘 바보처럼 속아." 그의 내부에서 비웃음 소리가 한차례 들려온다. 비웃음은 하나의 갈래에 속해있지 않았다. 거기에는 여러 갈래의 비웃음이 있었다. 그의 종자들은 자기만의 색채로 그를 비웃고 있었다. 웃음소리가 목선을 따라 빗물처럼 흘러내리며 제비초비부터 발등까지 그의 존재를 조롱해보였다.

그는 이번엔 정말 어떤 흔적을 발견하고 멈춰 선다. 핏자국이 지도처럼 그려진 흔적이 있다. 부근의 흙무더기는 누군가가 누워있던 무게로 움푹 파여 있다. 시체는 어디론가 질질 끌려갔다. 자세한 경로는 알 수 없었지만 얼핏 따라가니 두어 셋의 흔적이 더 있었다. 가파르게 깎인 도로 턱을 넘어 마른 풀과 흙껍질의 공터는 누군가가 지나간 흔적으로 너저분히 파여 있었다. 방부목 울타리가 빙그렇게 둘러진 공터였다. 공터에서 쓰러진 벤치들이 말라비틀어진 풀들을 관처럼 매장하고 있다. 비릿한 냄새에 구역질이 났다. 그는 계속해서 죽음과 살인의 냄새를 맡는다.

벌써 다 떠났을 거야.

그가 그 순간만큼은 희망과 거짓에 감사했다.

갑자기 구루마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비틀거리더니 한순간에 와장창하고 넘어지고 말았다. 바퀴의 연결부 한쪽이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부서져 있었다. 그는 흩어진 폐품들에서 예비 부품으로 쓸 만한 것들을 찾아보았다. 마땅한 건 없었다. 그는 몸을 구부려 하나하나 잡동사니들을 끌어 모았다. 그것들은 자루에 들어있을 때마다 흩어졌을 때 많아보였다. 자루 안쪽으로 차곡차곡 수납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동안 어떻게 이 조그만 공간에 이것들을 넣고 다닐 수 있었는지. 몇 번이나 물건들을 다시 뺐다가 넣었지만 여전히 까다로웠다. 그는 결국 몇몇 골동들을 여기에 두고 가기로 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다. 짐은 바퀴 하나 없는 그가 들고 가기엔 너무 거추장스러웠다. 더 많은 것들을 버려야했다. 남자는 곧바로 앙상한 엉덩이를 땅에 묻고는 버릴만한 짐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그는 무덤처럼 황량한 공터를 돌아보았다. “너에게 딱 알맞은 장소군.” 짐을 정리하다가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통조림이 하나 나왔다. 그는 그것을 까서 우물우물 먹었다. 의식을 치르듯, 천천히 씹어서 먹었다. 금방 동이 났다. 오랜만의 식사였고, 당분간 식사는 더 없을 것이다. “편식을 하지 않으면 좋을텐데, 꼬마야.” 식량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먹을 것의 기준을 좀 더 넓히자면 주변엔 온통 식량뿐이었다. 그는 입 안에 남은 건더기를 한참동안 씹어 삼키곤 침을 퉤 뱉었다.

그는 버려둔 짐들을 담벼락 밑에 묻었다. 그리곤 돌멩이로 담벼락에 조그만 표시를 해두었다. 다시 어깨에 짐을 멘 그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조만간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예비용 손전등까지 망가지고선 혼잣말을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에게 들려오는 목소리도 점점 풍성해졌다. 불빛은 그에게 위안을 주었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그를 위안시켜주지 않았기에, 그는 스스로 위안을 제조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

 

고개를 돌리자마자 눈을 마주쳤다.

먼 거리였지만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불빛들이 자글자글하게 모여서 불빛의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빛과 기름과 전기는 귀중한 재산이었고, 무리는 그런 재산을 아무렇지도 않게 낭비하고 있었다. 탈 것들이 보였다. 엔진소리는 심장박동처럼 쿵쾅거렸다.

저 멀리 거대한 땅굴에서 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모래가 소용돌이와 창 모양으로 꿈틀거리더니 산산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몇몇 차량과 오토바이가 땅굴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사방이 먹먹한 기운으로 가득 차올랐다. 이윽고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낯선 음성이었다. 그는 조금씩 뒤로 물러서다가 떨리는 손으로 거적을 뒤적였다. 담배가 나왔다. 그는 어금니로 담배를 짓이길 듯 씹었다.

남자와 눈을 마주친 건 여자였다.

여자는 짙은 어둠을 망토처럼 두르고 있었다. 그는 제자리에서조차 숨이 차 호흡을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넌 이제 죽을 거야.” 그의 눈앞에서 초침이 느리게 느리게 흘러갔다. 그의 숨은 초침이 움직이는 순간에 매여 있었다. 그는 당장 숨을 쉬고 있음에도 여전히 자신에게 할당된 호흡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투창을 들고 있었다. 다시 보니 달랐다. 기다란 봉의 끝에 불빛이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허공을 향해 창처럼 겨누어진 불빛은 사냥감을 찾고 있었다. 당장 찌를만한 생생한 심장을 찾고 있었다. 다시 기묘한 감각이 그를 휩싸왔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가 언젠가는 이쪽을 바라바주길 바라는 것처럼, 아니면 전혀 바라지 않는 것처럼. 어느 순간 그녀는 그와 눈을 마주하게 되었다. 물론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그가 숨어있는 어둠을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으나, 거기엔 많은 것들이 있었다. 그 눈동자 속에서 많은 것들이 소리치고 있었다. 그는 눈동자와 눈동자 사이의 세계를 주시했다. 이윽고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얼굴을 한 여자는 허공에 대고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북소리도 들려왔다. 무거운 박자와 어우러진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의 정신을 지배했다.

저 여자가 널 죽이러 올 거야.” 그는 땅바닥에 몸을 바짝 엎드렸다. 저편에서는 이쪽을 쉽게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무너진 담벼락을 향해 몸을 기었다. 방독면을 바닥에 박고 포복하자 무릎과 팔꿈치가 얼얼했다. 그는 자신이 기어가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대로 죽기 좋은 자세야.” 불빛이 가까워졌다. 그는 땅에 온몸을 바짝 기댔다. 그대로 바닥을 뚫고 젖은 흙을 파고서 무덤을 찾아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는 불빛에 드러나는 그들의 문양을 보았다. 그들은 팔뚝에 기묘한 문양의 그림을 그려 넣고 있었다. 무리는 그를 향해, 아니면 그와 전혀 가깝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윽고 표정까지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개조한 경차와 중형차들은 보닛이 떨어져나갔거나 유리창에 금이 가 있었다. 요란한 경적이 울렸다. 무리는 이내 그의 오른편에 있는 오프로드를 지나서 갔다. 그는 숨을 참았다. 헤드라이트가 숨 쉬던 공기까지 닿았다. 그때였다. 여자와 눈을 마주쳤다. 여자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착각이야." 그는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불빛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다. 조명이 남자의 그림자를 비추었다. 놀란 남자가 무대 밖을 향해 곧바로 뛰었다. 총소리가 들렸다. 그의 몸이 갸우뚱하게 허물어졌다. 웃음소리가 들렸다. 의식이 가물거렸다.

 

*

 

불쌍한 그녀.

그는 갱도에 숨어있다.

불쌍한 그녀.

갱도엔 어둠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새겨져있다. 보이지 않는 한 명이라는 건 도망치는 자에겐 늘 이점이다. 그는 그런 식으로 많은 적들을 피해왔다. 그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혈흔이 붉은 실처럼 이어진다. 추적자들이 조만간 닥쳐올 것이다. 그는 어깨를 싸매며 걷는다.

그녀는 저주에 걸렸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쌍한 그녀.

그는 어두운 땅 밑으로 땅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호흡이 물먹은 것처럼 무거워졌다. 모퉁이를 돌았더니 다시 기나긴 통로가 보였다. 얼굴을 바짝 가져다대야 윤곽이 보이는 땅굴 벽은 초점에서 벗어나면 부끄럼쟁이처럼 도로 숨어버렸다. 통로의 벽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돌과 피로 새겨진, 누군가가 죽어가면서 처절하게 새긴 그림들이었다.

철도는 끊겨 있었다. 한때는 열차가 그 길을 다녔다. 그에게도 이젠 동강이 나 잘린 뱀처럼 쓰러진 열차에 차표를 내고 다니던 기억이 있었다. 세상이 이렇게 되고서 며칠은 열차에 숨어 떨면서 보낸 적도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갱도의 천장에는 미처 추락하지 못한 돌기형의 암석들이 튀어 나와 있었다. 언제 무너져도 모를 천장이었다. 그는 망연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하늘을 떠받치고 있어.

남자는 웃음 지었다.

그렇지?

?

남자는 품속을 쓰다듬었다. 아무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그는 수십 년간 이 도시를 떠나지 못했다. 그 사이에 도시는 그가 낯설 만큼 변해버렸고, 그 역시 도시가 알아보지 못할 만큼 변하고 말았다. 그는 철골이 드러난 벽을 더듬으며 한발자국씩 걸었다. 방독면 너머로 해묵은 기침이 새어나왔다. 그가 쓴 방독면도 처음엔 남의 것이었다. 코트도 권총도 남의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남의 것을 빌리며 살아왔다. 세상이 어두워진 뒤로는 그의 기억에도 장막이 드리워졌다. 그는 더는 다른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에겐 오로지 그때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만이 급했다. 그게 다였다. 도시의 옛 모습은 그 이름만큼이나 희미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악취가 났다. 그는 손에 익은 감각을 떠올렸다. 언젠가 그는 한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필름에서 햇살이 벌꿀처럼 끈적거리고 있었다. 카메라가 위아래로 흔들리더니 벌꿀을 녹인 것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에게 달려들어 곧 그의 목을 두 손으로 끌어안았다. 거기선 지금보다 좀 더 부드럽고 달콤한 냄새가 났다. 그랬던 것 같았다. 기억은 늘 영화의 예고편처럼 드문드문했다. 퍼즐을 맞추려 해도 이음새가 맞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그는 혼자가 되었다. 혼자가 되었을 때, 그의 탄창엔 한 발이 비어있었다. 희미한 기억이었다. 그는 그 탄알이 외딴 허공을 향해 발사되었기를 바랐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대신 권총의 총알이 어째서 자신에게 발사되지 않았는지를 생각해왔다.

그는 다시 코트를 툭툭 두드렸다.

대답은 여전히 없었다.

  

*

 

소녀는 산발이었다.

산발은 다리를 절뚝이고 있었다. 불빛이 흔들리는 길목이었다. 무리와 떨어진 듯, 산발은 이를 박박 가는 소리와 함께 혼자 벽에 기대서있었다. 산발이 그의 기척을 알아차렸다. 소녀가 든 불빛 너머 벽을 기어오른 두 그림자가 숨 쉴 때마다 일렁거렸다. 산발은 품에 끝이 뭉툭한 날붙이 끌어안고 있었다. 두 눈이 마주쳤다. 소녀는 날붙이를 한 손에 들고 으르렁거렸다. 그는 희미하게 떨리는 손으로 권총을 들었다.

 

그거 놔.

 

산발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당장 버려.

 

야생의 소녀는 입을 열었다. 더러운 혀에서 알 수 없는 말이 구정물처럼 흘러나왔다. 그는 알아듣지 못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산발을 한 소녀는 말을 멈추곤 이를 악다물며 으르렁거렸다. 이빨 틈새로 흘러나오는 괴음이 날짐승처럼 거칠었다. 소녀의 팔뚝에는 기묘한 문양의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다시 보니 조잡하게 새긴 문신이었다. 살을 파고든 그 자국들이 소녀가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고 구겨지고 일그러졌다. 산발은 곧 쇄골까지 씩씩거리던 숨을 멈췄다. 그리고 그에게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소녀에게선 젖은 흙냄새와 지독한 악취가 났다. 그의 피가 총신에 뚝뚝 떨어졌다. 날붙이가 다가오기 전에 권총의 개머리판이 더 빠르게 허공을 갈랐다. 소녀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의 발이 떨어진 날붙이를 밟았다.

 

따라와.

떨리는 손이 소녀의 머리를 잡아챘다. 엉킨 머리카락이 수초처럼 흔들거렸다. 그의 손등엔 억세고 단단한 손톱들이 박혔다. 그가 머리를 더 거세게 잡아당기자 철판을 긁는 악다구니가 갱도 가득 퍼졌다. 그는 산발의 입을 막아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빨이 드러나지 않게 제대로 틀어막아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은 생각에서 그쳤다. 그는 목 쉰 비명에 맞춰 비척비척 걸어갔다. 한걸음마다 생명이 한 움큼 빠져나갔다.

 

누군가 답해줘.

 

태엽이 서서히 감겼다. 회중시계가 신경을 곤두세울 만큼 느리게 초를 세었다. 그는 초침을 보고 있었다. 초침이 초와 초 사이에서 달리다가 서서히 걷는 순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회중시계는 그의 눈앞까지 가까워졌다. 그는 시계의 날카로운 침이 눈알에 콕콕 닿는 걸 느꼈다. 달팽이관에 들어찬 톱니바퀴 소리가 처음에는 거대하게, 점점 조그맣게 사그라졌다.

머리칼을 쥐어 챈 손에 힘이 풀렸다. 그는 허공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걸음을 멈춰 섰다. 산발이 비명을 멈췄다. 동시에 남자가 허물어졌다. 권총이 바닥을 굴렀다. 소녀와 권총이 피로 흠뿍 젖어있었다. 소녀는 조금 주춤거리더니 이윽고 헐떡이는 숨소리와 함께 총을 집어 들었다. 산발은 곧바로 남자에게서 멀찍이 물러서서, 쓰러진 그를 겨낭한 채 허겁지겁 방아쇠를 당겼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녀는 다시 권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공이가 허공을 때렸다. 우악스러운 손길에도 총은 요지부동이었다. 탄창이 비어있었다. 빈 껍데기뿐인 총이었다. 안에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몇 번이나 방아쇠를 당겨도 반응이 없자 산발은 소리를 지르며 총을 내던졌다. 팽그르르 돌아가던 권총이 그의 어깨 맡에서 멈췄다.

소녀는 절뚝이는 다리로 남자를 툭툭 찼다. 그는 숨 쉬지 않고 있었다. 심장도 뛰지 않았다. 산발은 한동안 남자를 바라보더니 비틀거리며 그의 자루를 거칠게 끌었다. 긴 세월동안 폐품의 무게를 지탱해온 자루가 찢어지고 고철들이 둑이 터진 것처럼 후루룩 쏟아져 나왔다. 산발은 놀란 얼굴로 그것들을 보았다. 깨진 콜라병, 전등, 사이드미러, 하드커버만 남은 책, 이기 나간 손톱깎이, 우퍼가 찢어진 스피커처럼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산발은 그것들을 버려두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안으로, 더 깊숙한 안쪽으로 들어갔다.

 

*

 

그는 깨어있었다. 총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심장이 멈췄지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는 한 손을 뻗어 총을 잡아 코트에 쑤셔 넣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일어나려다 다시 쓰러지곤, 한쪽 어깨로 벌레처럼 바닥을 기었다. 그는 소녀가 갔던 길을 뒤따라갔다. 소녀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회중시계가 바닥에서 떨어져있었다. 회중시계의 겉면이 흐릿하다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톱니바퀴 소음이 멈춘 심장 대신 째깍거리고 있었다. 절뚝이는 소녀는 그보다 빨랐다. 그래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어둔 모퉁이를 돌자 갱도는 끝에 다다랐다. 그는 곧 갱도 너머를 보았다.

갱도의 검은 아가리 너머에 보금자리가 있었다. 그는 네발동물처럼 소녀에게 기어갔다. 소녀는 놀란 눈빛으로 홀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는 권총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소녀의 시선이 닿고 있는 곳에는, 한쪽 다리가 갸우뚱한 탁상과 전구가 깨진 전등이 놓여 있었다. 잉크가 말라붙은 펜이 불에 그슬린 노트에 끼워져 있었다. 그 왼편에는 오래된 브라운관이 케케묵은 먼지로 뒤덮여있었다. 맞은편에는 갈색가죽소파가 보였다. 맡에 놓인 서랍은 칸마다 옹기종기 가위나 풀 같은 문구로 채워져 있었다. 걷다보니 침실이 나왔다. 침대 프레임 위에는 이불솜이 삐져나온 이불이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원목 옷장에는 사계절별로 정리해둔 의상이 있었고 또 화장대는 패션 잡지와 오래된 화장품들로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사진첩이 놓여있었다. 아무런 사진도 들어있지 않은 사진첩이었다. 거대한 고무대야와 부러진 샤워기가 놓인 간이 욕실도 있었다. 변기엔 한 방울의 물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옆으로는 전시관이었다. 긴 탁자에 하나하나 올려둔 조각상들, 또 액자에 담긴 키치들이 벽에 다섯 걸음 간격으로 걸려있었다. 소녀는 그쪽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둠 너머로 공간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이것들을 모아서 뭐가 달라진 거지.”

남자는 소녀의 등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도대체 뭐가 달라지는 거지.”

그는 결국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쏘지 못했다. 그 대신 남자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오래된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자 곧이어 소녀는 여자가 되었다. 잠든 그의 곁으로 여자가 서서히 걸어왔다. 그는 자신을 쓰다듬는 여자의 눈동자를 바라볼 수 있었다. 총소리가 홀 안을 가득 울렸다. 여자는 피를 흘리며 비틀거렸다. 그리곤 저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더니 낭떠러지 너머로 떨어져버렸다. 기억의 야윈 어깨가 그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불현듯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총구로 자신을 겨누었다. 입술은 메마르고 백태가 낀 혀에선 짭짤한 맛이 났다. 그는 언제나 마지막 한 발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이윽고 총구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한순간 총성이 이 우주를 잠식해가는 걸 느꼈다. 하지만 총성은 아직 모자랐다. 그는 시끄럽게 째깍이는 회중시계에 총구를 겨누었다. 다시 한 발, 회중시계가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유리는 깨지고 파편이 튀었다. 이음새가 부서지며 시침이 송곳처럼 시간을 찔렀다. 그는 미소 지었다. 그러자 세상은 다시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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