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연세춘추에 입사한 지 벌써 8개월 정도가 돼간다. 연세춘추 생활 초반에는 도대체 내가 왜 이곳에 있을까라는 의구심에 몸서리 쳤지만, 어느덧 어엿한 부기자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적응하기 힘든 점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겸임기자’라는 점이다. 소위 말해서 겸임기자는 부원이 32명인 연세춘추 내에서 단 3명밖에 없는 상당한 ‘희귀종’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보도부와 사진부 일 두 가지를 수행하는 겸임기자로, 업무량이 일반적인 기자의 두 배에 달한다. 나는 매주 수많은 글과 사진들을 뚫어지게 보고 있노라면 스스로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 만다. 가령 나는 매주 보도기사를 쓰기 위해 학교 곳곳에 전화를 돌리고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든다. 이는 기자의 기본적인 역할이지만, 이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이 대다수라는 점에 매번 당황한다. 아무리 ‘공적인 이익’이라는 명분으로 그들을 설득해도, 이미 기울어진 그들의 마음을 뒤집기가 쉽지 않다. 전화기 넘어 들리는 취재원의 망설임에 내 마음도 졸여져만 간다.  

그리고 누군가의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면 상대방이 손바닥으로 가리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이렇게 고단한 겸임기자 생활 속에서도 내가 낙을 얻는 것이 있다. 그것은 글과 사진을 힘들게 기록하는 과정에서 세상을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 10월은, 나에게 기자로서 롤러코스터와도 같은 기간이었다. 나는 첫 번째 주부터 ‘노량진 포토다큐’ 촬영 때문에, 금요일 밤 10시에 노량진으로 가는 1호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내겐 유난히 춥고 바쁜 날이었기에 카메라를 드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래도 셔터에 손을 대고 주변을 살펴보니 그곳에는 숨 가쁘게 삶을 살아가는 도시인들이 있었다. 밤에 포장마차에서 허기를 달래는 고시생, 동료에게 고민을 풀어놓는 아저씨, 짐을 정리하는 상인 등 모두가 현실을 저마다의 의지로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노량진에서의 촬영을 마치고,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춘추실에 출근해 포토다큐의 제목과 기획의도를 썼다. 결국 내가 떠올린 제목은 ‘도시인의 꿈이 머무르는 곳, 노량진’. 내가 취재를 통해 관찰할 수 있었던 도시 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노량진을 상징하는 제목이었다. 

이처럼 연세춘추 기자로서의 생활은 의무감에 힘들지만, 때론 나 자신의 경계를 넘어 우리네 삶을 뒤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준다. 그렇다. 춘추는 분명 내 자신의 순간의 여유와 안식을 가져간다. 하지만 나뿐만 아니라 춘추를 보는 모두에게 세상에 대한 생각을 영원히 선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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