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도시, 파주에 가다

가을, 청명한 하늘 아래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낙엽을 책갈피 삼고 싶은 계절이다. 학교 도서관은 계산기와 전공 도서에 파묻혀 있는 사람들로 가득해 조용히 독서하기에는 민망스럽고, 카페는 시끄러운 대화들 때문에 활자가 눈앞에서만 맴돈다. 물론 도서관에서, 카페에서, 혹은 집에서 혼자 조용히 책을 읽을 수도 있겠지만 오로지 책만을 위한 공간이 있다면 어떨까? 상상만 해도 책벌레들이 행복할 것 같은, 책벌레들의 낙원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 서울 근교에 있다. 책방과 갤러리, 그리고 북카페로 가득한 파주 출판도시의 두 길, 광인사길과 회동길을 차례대로 거닐어봤다.

주말의 한적함을 원한다면, 광인사길

▲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1층에 위치한 북카페의 전경

파주 출판도시는 우리대학교 신촌캠에서 일산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일산동구청까지 간 뒤 그곳에서 200번 버스로 갈아타면 도착할 수 있다. 기자가 1시간 반가량 버스를 타고 가서 내린 곳은 파주 출판단지 가운데에 있는 이석사거리 정류장. 이석사거리에서 바로 보이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한 출판사 뒤에 또다른 출판사가 있고 또 출판사 뒤에 출판사가 있는, ‘출판도시’의 면모를 곧바로 확인할 수 있다. 교보문고와 다락원 같은 대형 출판사와 출판사들이 운영하는 책방들이 밀집해 있는 이 골목의 이름은 광인사길이다. 광인사길은 1884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출판사인 광인사를 기념해 명명된 길로 전체 길의 길이가 1.1km에 이른다. 처음 맞닥뜨린 광인사길은 주말이라 문을 닫은 출판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순간 파주 출판도시가 한적하다 못해 죽은 듯 조용했다.
하지만 길을 따라 걷다 보니 광인사길의 서쪽 끝과 맞닿아 있는 갈대샛강변에서 주말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샛강 갈대숲에서 딸과 함께 공원에서 놀고 있던 홍성우(37)씨는 “집이 김포라 가까워서 딸과 함께 자주 놀러 온다”고 말했다. 홍씨처럼 아이들을 데리고 소풍을 나온 가족들도 많았지만 강변을 따라 자전거를 세워두고 쉬고 있던 무리도 있었다. 영등포구 대림사이클의 부장 박귀철(53)씨는 “코스도 좋고 차가 별로 없어서 안전하다”며 “통일전망대까지 10km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것도 장점”이라고 말했다.
특이한 모양의 건축물인 ‘보리책방’을 지나 강 건너편에 보이는 아웃렛 방향으로 길을 걷자 곧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아래 미메시스)과 1층의 북카페가 보였다. 미메시스는 건축계의 시인이라 불리는 알바루 시자가 설계한 미술관으로 건축물로서의 의미도 크다. 예쁘게 꾸며진 정원을 지나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안에 들어가자 건물 한 편을 가득 채운 책들과 카페가 나왔다. 커피를 시켜놓고 푹신한 의자에 앉자 몇 시간 내내 돌아다녔던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 미메시스 심화봉 경영관리팀장은 “미메시스는 출판도시라는 곳에서 북카페를 운영할 뿐만 아니라 전시회를 운영하는 점이 특징”이라며 “상업적 전시공간이 아닌 건축 자체로 방문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고 말했다. 북카페 위층에서 진행되고 있는 현대 미술 전시회를 보러 들어가니 자연광이 그대로 들어오도록 설계돼있어 미메시스 건물의 정수를 느낄 수 있었다. 푹신한 의자와 언제든지 뽑아볼 수 있는 출판사 ‘열린 책들’의 책이 가득 쌓여있는 미메시스에서 머문 것도 잠시. 하늘이 우중충해질 기미가 보이자 기자는 서둘러 파주 출판도시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회동길로 향했다.

파주의 심장, 회동길

▲ ▲지혜의 숲 양쪽 벽면은 장서들로 빽빽히 메워져 있다.

하늘은 컴컴해졌지만 회동길로 들어서자 도시가 숨을 되찾았다. 단순히 산책 온 사람들이 아닌 파주 출판도시를 느끼러 온 사람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 저도 모르게 끌려 들어간 문발리 헌책방 골목(아래 헌책방 골목)에 들어서자 헌책 특유의 냄새가 온몸을 휘감았다. 냄새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리자 바로 눈에 들어온 것은 6·70년대 옛날 집 처마처럼 만든 서가와 그 안에 꽂힌 색 바랜 헌책들. 문발리 헌책방 골목의 김형윤 사장은 “청계천 헌책방 골목의 느낌이 나도록 인테리어를 해 놨다”며 “골목의 느낌은 살리되 책을 여유롭게 볼 수 있는 ‘널찍한 헌책방’의 모습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비 때문에 헌책방 골목 밖으론 나가지 못해 헌책방 골목을 좀 더 돌아다녀 보니 헌책방과 카페, 그리고 레코드가게가 합쳐진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헌책방 골목 한 편에서 소극장과 음반 쪽을 담당하고 있는 곽준태(53)씨는 “추억을 찾는 사람들이 자주 오곤 한다”며 “LP음악을 잘 모르는 90년대생들도 부모님의 영향으로 이곳을 찾곤 한다”고 말했다. 곽씨는 기자들이 연세대학교에서 왔다는 말에 고려대학교 대표응원곡인 ‘민족의 아리아’의 원곡을 들려줬다.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든 LP판을 돌려 음악을 들려주니 헌책방과 어울려 아날로그 한 감성이 묻어났다.
비가 그치고 나온 회동길에서는 봉고차를 타고 단체로 출사를 온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피노키오를 주제로 한 목각인형부터 동화책까지 다양한 전시품을 볼 수 있는 피노키오 뮤지엄 앞에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사람들이 많은 만큼 길에는 생동감이 돌았다. 조용하게 사색을 즐길만한 광인사길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 또한 회동길은 광인사길보다 많은 카페가 문을 열고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으며 카페마다 가득 찬 사람들은 차를 마시며 테이블마다 책을 꼭 한 권씩 들고 있었다.
회동길 코스의 마지막은 아시아 출판문화정보센터에 있는 도서관 ‘지혜의 숲’이었다. 아시아 출판문화정보센터 1층에 있는 지혜의 숲은 전국 각지의 사람들과 출판사들이 기증한 도서들이 소장돼 있으며 문화행사도 종종 한다고 하니 파주출판도시 여행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코스다. 또한, 지혜의 숲은 파주출판도시를 검색하면 바로 연관 검색어로 뜰 만큼 파주출판도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지혜의 숲에 들어가자 사방의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장서들이 기자 위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마치 들어가는 걸음마다 책 속에 파묻히는 기분이랄까.
지혜의 숲 안으로 더 들어가자 한가운데 카페를 중심으로 넓게 펼쳐진 테이블과 그 테이블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보였다. 가족들, 연인,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온 사람들은 독서의 전당인 지혜의 숲에서 책을 하나씩 펴고 감히 말을 걸기가 미안할 정도로 책 속에 빠져 있었다. 마침 테라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가톨릭대 이지은(아동학·13)씨는 “지혜의 숲만의 분위기가 좋아서 자주 온다”며 “자리도 편안하고 깨끗해서 좋다”고 말했다. 책을 읽기보다는 공부를 하기 위한 장소가 돼버린 학교 도서관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적당히 시끄러운 화이트 노이즈* 속에서, 함께 온 사람들과 작은 목소리로 대화하면 누구 하나 눈치 주지 않는 그야말로 온전히 독서를 위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미메시스 건너편에 쓰여 있던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문구처럼 책과 사람은 공존하며 책은 책답게, 사람은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존재이다. 하지만 요즘엔 주변에서 편하게 책 읽을 공간하나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 시간을 조금만 내서 파주출판도시로 간다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아도 좋다. 또한 오는 10월 5일부터 11일까지는 문화의 다양성 수용과 지식교류를 중심으로 한 파주 북(Book)소리 축제가 파주출판도시에서 펼쳐진다고 하니 파주출판도시를 찾아가기에 지금만큼 좋을 때가 없다.

*화이트 노이즈 : 백색 소음. 소음은 소음이지만 수면과 집중에 도움이 되는 소음이다. 너무 조용한 도서관보다 적당한 소음이 있는 카페에서 공부가 더 잘되는 경험을 해봤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글  김민호 기자
kimino@yonsei.ac.kr
 

사진 전준호 기자
jeonjh1212@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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