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을 조명하다

▲ #1. 광주에는 5.18 민주화운동을 기념해 518번 버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 버스는 노선을 통해 5월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기자들 역시 이 버스를 타고 민주화운동의 발자취를 따라가봤다.
▲ #2. 5·18 자유공원은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을 감금하고 고문했던 장소를 그대로 재현했다. 당시 무고한 시민들도 이유없이 무차별 폭력을 받았다.
▲ #3. 다음으로 찾아 간 5·18 국립묘지에는 민주화운동의 열사들을 기리는 탑이 있다. 탑 중간의 난형환조는 당시 희생되신 분들의 영혼이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라는 희망을 상징한다고 한다.
▲ #4. 희생된분들의 국립묘지는 그 당시의 아픔과는 달리 밝은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 이런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 #5. 5·18 민주화운동은 유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김영삼정부 이후 광주 민주화운동은 재조명받기 시작했고 지금 국민들과 함께 그날을 기억하며 상처를 치유하고 있다.


‘트라우마’라 불리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인간이 전쟁, 고문, 자연재해, 사고 등의 심각한 사건을 경험한 후 그 사건에 대해 공포감을 갖게 되고, 계속적인 재경험을 통해 고통을 느끼며,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에너지를 소비하게 하는 질환이다.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지 어느덧 35년이 지났다. 하지만 기자가 직접 찾아간 광주에는 피해자·가해자를 막론하고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많은 이들이 35년 전의 경험으로 인해 여전히 트라우마 증세를 겪고 있었다. 1980년 5월의 광주, 아직 그곳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만나봤다.
 

고통 속에 흐른 35년의 세월


35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광주에는 그때 그 시절의 고통이 남아있었다. 기자가 5·18 국립공원을 가던 도중 만난 택시기사 서정기(55)씨 역시 공수부대에 의한 피해자였다. 서씨는 “당시 재수생 신분이어서 학원수강증을 보여줬지만 공수부대는 ‘어차피 대학을 가면 데모를 하니 미리 맞아야한다’며 폭력을 행사했다”고 당시의 상황을 회상했다. 이어 서씨는 “그 때의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며 “그 당시에는 이유 없이 많은 사람들이 폭행당했다”고 덧붙였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5·18 민주화운동은 광주시민들에게 절대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어제까지 나와 함께 밥을 먹고, 같이 지낸 가족을 하루아침에 다시는 못 보게 된다면 그 슬픔은 어떤 말로도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35년이 지났지만 흘러간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그날의 상처를 안고 사는 유족들을 만나봤다.
 

#1.
1980년 5월 27일, 당시 17세였던 문재학군은 전남도청을 지키고 있다가 공수부대에 의해 사살됐다. 공수부대가 무고한 시민을 사살한 후 민주화운동에 가담한 문군은 27일 전남도청을 끝까지 사수하다가 결국 영영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 후 문군의 어머니인 김길자(76)씨는 밤낮없이 아들이 대문을 열고 집에 오는 것 같은 환상을 보고, 잠에 들면 항상 아들에 대한 꿈과 함께 경찰들에게 끌려 다니는 꿈을 꾸는 등 트라우마를 겪게 됐다. 지금은 광주 트라우마센터 등을 통해 어느 정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났지만 마음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는 못했다.

#2.
영화 『화려한휴가』를 보면 맹아였던 아이가 공수부대의 폭행으로 사살되는 장면이 있다. 바로 5월 21일 광주에서 시위가 확산되는 계기이기도 한 이 장면은 당시 29살이었던 김경철군을 두고 만든 사례다. 5월 19일, 맹아였던 김군은 학생이냐고 묻는 공수부대원의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자 곤봉으로 폭행을 당해 그 자리에서 숨졌다. 김군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공수부대에 의해 처음으로 살해된 시민이다. 김군의 죽음으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은 더욱 확산됐다. 그 후 김군의 어머니 임근단(84)씨는 몇 년 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흰 옷을 입은 아들이 피범벅이 돼 꿈에 나오거나 곤봉에 맞아 숨진 아들의 모습이 그대로 꿈에 나타나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또한 임씨는 몇 년간 그때의 트라우마로 인해 정신과 약을 먹으며 하루하루를 견뎌왔다. 임씨는 “매년 5월이 되면 그때 그 악몽이 다시 떠오르지만 남은 자식들과 죽은 아들의 딸을 보며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고 전했다. 이어 임씨는 “5·18 민주화운동을 촉발한 비극적인 일들이 두 번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3.
1980년 5월 26일 없어진 동생을 찾으러 나간 당시 20세의 권호영씨는 집을 나간 지 13년 만에 어머니의 품안으로 돌아왔다.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권씨는 동생을 찾는다는 말만 남기고 전남도청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27일, 행방불명된 아들을 찾으러 나간 어머니는 아들이 사살됐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의 시체를 찾기 위해 모든 시체들을 헤집고 다녔다. 하지만 옷도 입혀놓지 않은 시체와 점점 부패되고 썩어가는 시체들 사이에서 아들을 찾는 것은 무리였다. 그 후 13년이 지난 1993년 어머니 이근래(75)씨는 DNA검사를 통해 아들의 시체를 찾을 수 있었다. 당시 이씨는 정신과에 20일 동안 입원을 했지만 트라우마를 수년간 겪었다. 이씨는 계속 아들에 대한 환상으로 정신과 약을 수년간 복용할 정도로 아들에 대한 그리움의 고통에 시달렸다.
 

이렇게 유족들이 겪은 고통의 기억은 3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생생히 살아있다. 하지만 국가의 적절한 보상이 이뤄지지 않아 유족들의 고통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김길자씨는 “유족들이 수억 원씩 받아 호화롭게 생활한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는 너무 힘들었다”며 “자식을 잃은 그 슬픔은 어떤 것으로도 보상이 될 수 없지만 정부가 좀 더 관심을 가져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어 김길자씨는 “정확히 누가 책임자인지 밝히는 작업부터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는 다른 유족들의 의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사회 일각에서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열사들의 유족들을 위로하기보다는 왜곡된 편견과 근거 없는 소문들로 유족들의 상처를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여기에 또 다른 피해자가 있다


5.18 민주화운동은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에게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본인의 의지에 따라 살상을 자행한 것이 아닌 상명하복의 군대 원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들. 그들이 겪고 있는 트라우마에 대해 알아봤다.
 


#1.
전라남도 영광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양복(51)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군에 입대해 제3공수여단 33대대로 자대 배치됐다. 그러던 어느 날 김씨는 영문도 모른 채 상관의 지시에 따라 광주작전에 투입됐다. 김씨는 작전 중  시민들이 끌고 오는 전차에 깔려 죽는 전우를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어제까지 동고동락했던 전우들이 부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 사건들로 김씨는 아직도 그때의 기억에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다.


#2.
제3공수여단 63대대 부대원으로 진압 작전에 참여한 임동기(53)씨. 임씨는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시민군에 의해 동료가 죽는 걸 목격했다. 그 충격으로 30년 동안 트라우마를 앓다 3년 전에야 비로소 공황장애 진단을 받고 치료를 시작했다. 


이처럼 가해자들 또한 피해자에 버금가는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하지만 진압작전에 참여한 군인과 같은 가해자에 대한 사회적 주목과 보상은 사실상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광주 트라우마센터 관계자 신원경씨는 “5·18 민주화운동 진압을 통해 생긴 군인들의 트라우마는 구체적인 장면과 폭력 등을 통해 생긴 트라우마”라며 “이러한 트라우마는 제2차 세계대전이나 월남전을 겪은 군인들의 트라우마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고 전했다. 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 진압에 참여한 군인들은 정당하게 치료를 요구할 수 있는 같은 희생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좋지 않아 보상을 포기하곤 한다. 김양복씨는 “월남전 참전용사들이나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은 명예라도 있지만 진압부대원들은 명예는커녕 죄인의 굴레를 쓰고 있다”고 전했다. 임씨 또한 “사회적 시선이 따가워서 참고 견디다 이제야 병원을 찾게 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주목받지 못한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그들에 대한 정확한 전수조사와 구체적인 대책 또한 필요한 시점이다.
 

잊을 수 없지만 잊어야 하는 5월의 상처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트라우마는 국민을 보호해줘야 하는 국가가 그 믿음을 깨고 폭력을 가해 생긴 정신질환이기 때문에 재해를 통해 발생한 트라우마와 상이하다. 이는 부모가 아이를 학대해 아이에게 생긴 트라우마와 같은 맥락이다. 또한, 구체적인 폭행 장면 목격과 실제적 폭력 등을 통해 발생한 질환이기 때문에 전쟁을 겪은 군인들이 앓는 정신질환과 비슷한 유형이다. 
 

5·18 기념재단이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부상자와 유족, 구속자의 24.1%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 받고 있다. 이와 같은 피해자의 치료를 위해 정부는 지난 2011년 광주트라우마센터를 신설했다. 광주트라우마센터 강용주 센터장은 “5·18 이후 35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트라우마를 겪는 분들이 많아 그들을 위해 설립됐다”며 트라우마센터의 설립 취지를 전했다. 트라우마센터에서는 주로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치료를 진행한다. 강 센터장은 “정신적 상처를 의미화하는 작업을 주로 하고 있으며, 속 시원하게 고민을 말하는 과정을 거쳐 정신적 상처가 곪지 않도록 한다”며 “이러한 치유 과정을 통해 트라우마가 치유될 것”을 바라고 있다. 즉, 5·18 민주화운동이 현재 의미 있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그 당시 경험에 대해 털어놓음으로써 피해자가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정신의학 전문의들의 소견도 트라우마센터의 치료 방법과 다르지 않다. 가톨릭대학교 정신의학과 채정호 교수는 “사회가 피해자를 보는 시선이 치료에 큰 영향을 미친다”며 “공동체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실제 트라우마센터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이근래씨는 “트라우마센터에서 유족들이 모여 서로의 상처를 말하면서 위안을 받고 트라우마도 많이 극복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의 2차 대전 참전자들은 영예롭게 죽었다는 따뜻한 사회적 시선으로 인해 참전자들의 트라우마가 비교적 쉽게 극복됐다. 반면, 베트남 참전자들은 그렇지 못해 지금까지도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 채 교수는 “피해자와 생존자가 도움을 받기만 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서는 안 된다”며 “그들이 자긍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전했다. 많은 사람이 재난을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피해자의 고통을 재현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남의 고통을 재현한다는 윤리적 위험성 때문에 외면하게 되는 것이 더 큰 위험일 수 있다.


5·18 민주 유공자 유족회에서는 매년 5월 17일날 추모제와 18일 기념행사를 통해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있다. 이 행사는 희생자에 대한 추모뿐만 아니라 유족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방법 중 하나가 되기도 한다. 실제 유족들이 모여서 서로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또 참여하는 시민들과 이야기하며 상처를 치유한다. 5·18 민주 유공자 유족회 정춘식 회장은 “16일 오전부터 유족분들이 직접 음식을 하며 각자의 사연들을 이야기하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며 “그 때를 회상하는 것은 상처를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서로의 아픔을 나누는 것은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이라고 전했다. 또한 이 행사에 참여하는 많은 시민들과 단체들 역시 유족들의 아픔을 같이 공유하며 그들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지난 2011년 5월 25일,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은 유엔 유네스코 세계 기록문화 유산에 등재됐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5·18 민주화운동이 많은 동남아시아 국가와 아프리카의 민주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정작 우리나라는 5·18 민주화운동의 피해자에 대한 정책적인 대우는 아직 부족한 실정이다. 또한 당시 사망자 및 실종자의 가족들과 부상자 등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
 

상처는 낫지만 그 흔적은 남는다.
-미코와이 레이


폴란드의 문학가 레이가 말한 것처럼 트라우마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의 고통은 그들만이 짊어져야 할 짐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짊어져야 할 짐이며 숙제다. 

 

 

 

글 신준혁 기자
jhshin0930@yonsei.ac.kr
이정은 기자
lje8853@yonsei.ac.kr
사진 강수련 기자
training@yonsei.ac.kr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