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희의 소설 『혼불』을 따라서

겨울이 끝나고 해토(解土)가 시작되면서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은 서서히 녹아내리고 추위에 굳은 흙이 그 살을 풀었다.


생명의 근원인 봄이 오기 시작한 3월 초순. 완연히 사라지지 않은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면서 기자는 작가 최명희의 소설 『혼불』의 배경을 찾아 남원으로 떠났다. 서울에서 남원까지는 고속버스로 3시간 정도 소요되기에 새벽부터 움직여야 했다. 기자는 버스에 앉아 설레는 마음을 안고 성에 낀 창을 바라보며 오늘 여행의 그림을 끊임없이 그려보았다. 그렇게 두 시간 반 정도 지났을까,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국도를 달리기 시작한 고속버스는 뒤뚱뒤뚱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자의 눈에 드디어 춘향이와 이몽룡이 인사하는 표지판이 보였다. 남원이었다.
 

『혼불』을 찾아 걷고 또 걷다

▲ 혼불문학마을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혼불』 표지 모양의 표지판


‘혼불’이라는 말은 전라도 사투리로, 우리 몸 안에 있는 혼을 의미한다. 즉, 혼불은 사람이 죽을 때 몸에서 빠져나간다는 정신의 불인 것이다. 우리의 정신과 근원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소설『혼불』은 매안마을에 사는 매안 이 씨의 흥망성쇠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소설은 3대 종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상민과 양반의 계급문제까지 담고 있으며, 최명희 작가는 치밀한 취재를 통해 우리나라의 세시풍속을 세세하게 보여준다.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양반 마을인 매안마을은 남원의 끝자락인 사매면 노봉마을로, 이곳에는 현재 혼불문학마을(아래 문학마을)이 형성돼 여행객을 맞고 있다.
기자는 남원 시내에서 문학마을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자리에 앉아 가만히 둘러본 버스의 풍경은 서울과 매우 달랐다. 안내방송은 다음 정류장을 알려주는 대신 버스가 지나는 지역에 관련된 설화나 옛날이야기를 정겨운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었다. 각자 갈 길이 바빠 ‘삑’소리밖에 나지 않는 서울의 버스와는 달리 승객과 기사 아저씨간의 대화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바쁜 현대 사회가 잃어버린 모습인 것 같아 정겹게 느껴졌다.
버스가 달린 지 30분쯤 됐을까. 버스는 문학마을로 가는 길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도를 보면서 기자가 당황한 표정을 짓자 기사 아저씨는 “학생, 버스를 잘못 탔어! 가까운 버스정류장 앞에 내려줄 테니까 혹시 버스가 30분 안에 없으면 곧장 걸어가”라며 안타깝다는 눈빛을 보냈다. 기자는 놀란 마음을 다스리고 버스 시간을 확인한 후 매안마을을 향해 결국 걷기 시작했다.
 

“매안까지는 정거장에서도 한식경*이나 걸어 들어가야 한다”


매안마을을 찾아 시골냄새 물씬 풍기는 길을 20분 정도 걸었을까. 상민들이 살았던 거멍굴과 양반들이 살았던 매안마을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소설에서 설명하듯, 삼거리에서부터 걸은 지 30분 정도가 지나자 문학마을 이정표는 드디어 도착을 알렸다. 문학마을은 정말 문학마을다웠다. 주변에 보이는 컨테이너 박스에도 『혼불』의 책표지가 그려져 있었으며 소설 내용을 시각화한 벽화는 셀 수 없이 많았다. 기자는 곧장 마을 어귀에 있는 지도를 따라 매안마을을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으로 향했다.
기자는 언덕을 계속해서 올랐다. 이미 50분 정도 걸은 상태에서 눈앞에 펼쳐진 오르막길을 바라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오르고 올라 10분 정도를 또 걸었을 때, 드디어 매안마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도착했다. 비록 오랜 시간을 걸어 힘들었지만 광활하게 펼쳐진 매화낙지와 산세의 모습은 아픈 발을 잊을 만큼 마음을 벅차게 만들었다.
 

“그 들판은 매화낙지다. 산에 가로 막혀서 더 뻗어나가지 못한 것이 서운은 하다만, 땅의 지세가 아주 좋으니라.”
“매화낙지?”
“매화 매(梅), 꽃 화(花), 떨어질 락(落), 따 지(地), 그렇게 쓰지.”
“꽃이 떨어지는데 무엇이 좋은가요?”
“이 사람아, 꽃은 지라고 피는 것이라네. 꽃이 져야 열매가 열지. 안 그런가? 내 강아지.”
청암부인은 어린 강모를 무릎에 올려 앉히며 궁둥이를 토닥여 주었다.

▲ 마을 입구에 위치한 매화낙지를 그린 벽화


문학마을에서 찾은 『혼불』의 정취


“내가 그 참담한 형상 중에도 목숨을 버리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오로지 종부였기 때문이었느니라. …(중략)… 종부는, 그냥 아낙이 아니니라.”


풍경을 둘러본 기자는 문학마을을 본격적으로 탐방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찾은 곳은 세 종부인 청암부인, 율촌댁, 허효원의 생활공간이었던 종가였다. 안타깝게도 지난 2007년 일어난 화재로 인해 종가와 그 뒤에 있던 호성암까지 소실돼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었다.
종가의 터를 지켜보고 있으니 매안 이 씨 집안을 굳건하게 지켰던 종부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화재 속에서 살아남은 오래된 대문은 그녀들의 강직함을 대신해 사람들에게 지나온 세월을 직접 보여주고 있었다.
문학마을의 가장 위에 위치한 종가를 둘러본 후, 주욱 내려와 문학관 쪽으로 향하자 엄청난 크기의 저수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서북으로 비껴 기맥이 흐를 염려가 놓였으니, 마을 서북쪽으로 흘러내리는 노적봉과 벼슬봉의 산자락 기운을 느긋하게 잡아 묶어서, 큰 못을 파고, 그 기맥을 가두어 찰랑찰랑 넘치게 방비책만 잘 강구한다면 가히 백대 천손의 천추락만세향(千秋樂萬歲享)을 누릴 만한 곳이다”하고 이르셨다. …(중략)… 웬만한 가뭄이 들어도 푸른 물 찰랑이는 청호는 바닥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청암부인은 천추락만세향(千秋樂萬歲享)을 누리기 위해 2년 농사를 쉬고 이곳에 저수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청암부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이 저수지를 그녀의 택호를 따 ‘청호’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 천추락만세향(千秋樂萬歲享)을 새긴 비석과 혼불문학관의 전경


공사가 막바지에 달았을 때 우리나라는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잃었다. 나라를 잃은 슬픔 속에서 매안마을은 마침내 저수지를 완성했고 마을 사람들은 저수지 덕분에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아무리 일제라도 그들까진 망하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거대한 청호를 보며 ‘백성이 두 눈 뜨고 있는 한, 우리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마음을 다지며 일제의 침략을 버텨낸다.
 

▲ 문학관 옆에 위치한 청암부인의 청호. 마르지 않을 듯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청호를 실제로 보자마자 기자의 입은 떡 벌어졌다. 엄청난 크기와 더불어 절대 마르지 않을 것 같은 저수지의 모습은 청암부인의 공덕을 눈으로 보여주는 듯 했다. 저수지 옆에는 소원을 빌어보라는 팻말이 함께 붙어있었다. 문학마을에는 이를 비롯해 유난히 소원을 빌어보라는 말이 많다. 역시 소설 속에서도 소원을 비는 모습을 여러 번 찾아볼 수 있다. 거멍굴 사람 중 한명인 춘복이가 정월대보름에 뜬 달을 처음으로 보며 자신의 자식만큼은 양반이 되게 해달라 소원을 빌었던 달맞이 고개가 그중 하나이다.


달맞이에 일의 성패를 건 미친 사람처럼 단걸음에 내달아,
누구보다 먼저 동산 의의 날망에 올라선 심정이었다.
“달 봤다아아.”
달을 보고 춘복이는 “내가 너를 삼키리라.”


전시관 앞에서도 사람들이 빌고 간 소원들을 볼 수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소원이 적힌 나무들에는 ‘6학년이 되게 해주세요’라는 등의 귀여운 소원들도 함께 놓여 있어 기자는 함박웃음을 짓기도 했다.
소원들이 놓인 책상을 지나 직원들이 기거하는 꽃심관으로 들어가자 해설사아주머니가 기자를 반겨줬다. 추운 날씨에 따뜻한 차 한 잔을 나눠주던 해설사아주머니는 2시간동안 제대로 앉은 적 없던 기자에게 구원과도 같았다. 차를 마시며 기자는 이것저것을 물었다. 박은숙 해설사는 “혼불은 작가님의 근원에 대한 그리움에서부터 시작됐어요”라며 “우리 조상들의 세시풍속을 비롯해 전라도 지역의 방언 등을 알려주는 하나의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죠”라고 기자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주셨다. 실제로 『혼불』속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대화는 주로 전라도의 구수한 사투리를 이용한다. 또한, 모든 단어 하나하나에서 운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소리내어 읽는 그 자체만으로도 판소리가 된다.


만남과 이별의 장소, 서도역

▲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공간, 서도역


논 위에 철도가 놓이고 정거장 역사가 세워지면서 역장의 관사와 역원의 집, 그리고 밥집이며 점방들이 처마를 맞댄 옆에 몇 채의 새 집이 들어서고 주막과 여각이 어울려 생겨났다.


문학마을에서 길을 따라 10분 정도 내려오니 소설 속에서 정거장 혹은 매안역으로 불리던 서도역에 도착했다. 서도역은 1934년 간이역으로 운수 영업을 시작한 후 지난 2002년 전라선 철도 이설로 현재 위치에 신축해 옮겨왔다.

서도역은 『혼불』에 등장하는 역사처럼 1900년대 초반 실제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해놨기 때문에 『혼불』뿐만 아니라 다른 개화기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장소를 직접 눈으로 보는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혼불』 속 중요 장소인 서도역. 소설 속 서도역은 3대 종부인 효원이 신행**을 올 때 도착하는 곳으로 시집을 온 매안 땅을 처음으로 밟는 장소다. 그리고 강모가 전주로 공부하러 갈 때나 매안마을을 떠나 만주로 향할 때 지나는 역이기도 하다. 이곳은 말 그대로 소설 속 새로운 만남과 안타까운 이별의 교차점이다.
역사 안으로 들어가자 보인 빼곡한 낙서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지나갔는지 보여줬다. 하지만 『혼불』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이곳이 낙서로 가득한 모습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기자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역사를 나오면 길게 늘어진 기찻길을 볼 수 있다. 이제는 한 대의 기차도 지나다니지 않는 허울뿐인 기찻길이지만, 누군가는 계속해서 이곳을 떠나갔을 것이라는 걸 알기에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마치 아는 이를 떠나보낸 듯한 공허함도 느껴졌다. 기자는 한없이 펼쳐진 길을 보면서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멍하니 기찻길을 바라보고 있으니 자신을 여자로 보지 않는 어린 신랑과 앞으로 시댁에서 살기위해 신행을 온 효원의 불안한 마음이 느껴졌다. 집안이 몰락한 이후 만주로 떠나는 연약한 강모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기도 했다.
 

효원의 일행이 강모와 더불어 기차에서 내렸을 때, 정거장에는 한필의 나귀와 주렴을 늘이운 가마가 한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댁에서 마중을 보낸 것이다.
…(중략)…
이미 그들 일행이 정거장에 닿기도 전에 마을 사람들은 겹겹으로 돌러서서 신부 구경을 나와 있었다.…“신부는 어딧능교?”

▲ 길게 늘어진 기찻길의 모습


여유를 묻고 일상으로


매안마을에서 남원시내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3번밖에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버스 시간에 맞춰 해가 질쯤 여행을 마쳐야 했다. 남원시내로 돌아오는 길. 남원은 여전히 여유로웠고 버스 안에서는 승객들이 이야기꽃을 피웠다. “아들! 정형외과는 여기서 내려야 돼!” 기사아저씨가 다정하게 아이를 깨우는 모습을 바라보는 기자에게 한 할머니가 “서울서 왔능가?”하고 말을 붙이셨다. “네, 서울에서 왔어요!” 기자는 어색하게만 보였던 남원 버스 안 대화 속으로 점점 스며들어갔다.
버스를 타고 이동한지 30분 정도 지나 남원역에 도착했다. 날은 벌써 깜깜해져 가로등 불빛과 달빛만이 빛나고 있었다. 기자는 남원역에서 KTX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KTX가 너무나도 빠르게 남원을 벗어나 차츰 창밖의 시골풍경은 사라져갔고, 네온사인 불빛이 반짝이는 서울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버스를 타기위해 정류장에 섰다. 정겨운 남원과는 다르게 사람들은 실시간 버스 위치와 스마트폰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버스에 오르니 승객 간의 대화는 들리지 않았고 다시금 ‘삑’소리와 차체가 덜컹거리는 소리만이 존재했다. 다시 삭막한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절실히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최명희 작가 역시 이처럼 바쁜 삶의 모습 속에서 여유로웠던 우리의 근원을 찾아 이 글을 쓴 것은 아니었을까.
작가의 이른 작고로 인해 『혼불』이 완성되진 못했지만, 우리나라의 역사를 담고 있는 『혼불』은 독자들에 의해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한식경 : 밥을 한 그릇 먹을 정도의 시간. 약 30~40분을 의미한다. 
**신행 : 신부가 혼례식을 마치고 신방을 치른 뒤 신랑 집으로 가는 의식


글 오지혜 기자
dolmengemail@yonsei.ac.kr

사진 손준영 기자
son113@yonsei.ac.kr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