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연세와 「연전타임스」

▲ 「연전타임스」 창간호 제호

 
명문대학이 가진 자부심은 학교가 가진 전통과 역사에서 나온다. 전통과 역사가 만든 학풍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했을 때 자부심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다. 연세대가 고려대와 함께 명문 사학으로 불리는 이유는 이러한 정체성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서열화하는 사회 분위기와 각 학교의 구성원이 비슷한 배경을 가지는 최근의 추세로 인해 각 학교의 정체성도 비슷해지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존재하는데, 이는 우리가 명문으로서 쌓아온 자산이 사라진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자산은 무엇일까? 내년으로 다가온 연세춘추창간 80주년을 앞두고, 일제강점기 연희전문학교(아래 연희전문)가 명문으로 발돋움하는 과정을 살펴보며 우리가 전통을 이어나가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연희전문은 어떻게 명문이 되었나

재단의 과감한 투자

 

우리대학교 홈페이지에는 자랑스러운 연세인이라는 항목이 있는데, 여기에는 용재 백낙준, 위당 정인보, 외솔 최현배, 한결 김윤경, 홍이섭, 윤동주, 이영욱, 황정남, 김형곤 9명의 인물이 소개되고 있다. 우리대학교 발전에 큰 공헌을 했거나 뛰어난 업적을 남긴 전설들이다. 이 가운데 백낙준 선생 등 6명은 일제강점기 연희전문의 일원이었다. 1915년에 연희전문이 설립된 점을 감안하면 이들이 활동했던 시대가 우리대학교의 첫 번째 황금시대였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1930년대는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연희전문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었다. 조선 한문학의 제1인자로 불린 정인보, 세계적으로 유명한 천문학자 이원철, 사회경제사 연구의 대가 백남운, 조선의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로 불린 이순탁, 조선의 페스탈로치를 꿈꾼 최현배 등이 이 시기에 활동했고 김윤경, 김선기, 정인승, 홍이섭, 민영규 같은 학자들을 길러냈다. 이들은 모두 우리 국학의 연구와 반식민 아카데미즘에 맞서 업적을 쌓은 인물들이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연희전문은 어떻게 이런 학자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을까?

연희전문은 조선 교육계에서 사학으로서는 최고 학부로 이름이 높았으며 광대한 부지와 근대식 건물과 함께 재정적 지원이 있었다. 1925년 경성제국대학교(아래 경성제국대학) 예과가 462원의 경상비를 쓸 때 연희전문은 661원의 경상비를 썼다. 보성전문학교(아래 보성전문)142원에 불과했고 의대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아래 세브란스의전)797원임을 감안하면 얼마나 과감한 투자가 이루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추세는 계속되어 1940년까지 연희전문은 다른 사립전문학교에 비해 높은 수준의 경상비 지출이 이어졌다.

교수 대우도 최고 수준이었다. 1930년경 조선 최초로 안식년 제도를 도입해 교수들은 구미 각국의 제도와 학문을 배워올 수 있었다. 1930년 기록에 따르면 교수 월급은 220원이었는데 이는 도지사 월급 120원의 두 배 수준이었다. 당시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관공립학교의 교수 가운데 90%는 일본인인 상황에서 사립전문학교를 선택할 때, 뜻있는 학자들이 연희전문에서 가르치려고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연희전문 교수진은 조선인 37, 미국인 11, 일본인 4명이었는데 설립 당시와 비교해 교수진은 약 4배 증가했지만 일본인 교수는 3명에서 4명으로 늘어난 것으로 볼 때 연희전문이 조선인 교수를 우대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국학의 중심으로 민족사학의 대표가 되다

 

이렇게 모인 교수들은 자율적으로 학생을 가르칠 수 있었다. 연희전문은 선교사가 세운 학교임에도 종교를 따지지 않았는데, 위당 정인보 선생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음에도 연희전문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 수업에 있어서 자율성도 상당 수준 보장돼 있었다. 수업은 일본어가 아닌 우리말로 이루어졌는데 이에 대한 교수들의 응답은 '국학'이었다.

 

"문과 과장으로 있으면서 나는 국학 분야 과목을 새로 만드는 데 주력했다. 그때 일본 제국주의 밑에서 국사, 국어, 국문학이란 과목이 없었다. 한국 사람이 자기 나라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동양사란 과목이 있기에 동양사를 가르치면서 그 일부인 한국사를 가르치기로 하고 李允宰 선생으로 하여금 이 과목을 담당케 했고, 그 뒤에는 孫晉泰 선생이 담당했다. 조선어에 대해서도 일본의 정책이 조선어 사용을 금지했으므로 학과목으로 가르치지 못했던 때였다.

정규 수업 시간에 가르칠 수 없었으므로 이 방면에 관심이 있는 학생을 모아 수업이 끝난 후 과외로 조선어를 가르쳤는데 일찍이 이 방면에 연구를 많이 한 최현배 선생이 이를 맡아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한국 문학도 일반 문학 특히 한문학을 가르치고 있었으므로 정인보 선생이 한국의 한문학으로 가르치기로 했다.

그 후 1922년의 대학령에 따라 경성대학이 1924년에 설립되면서 조선어, 조선사 과목을 두게 되자 우리도 이 과목을 정과목으로 가르쳤는데, 일제하에서 국학 분야의 교육을 연전에서 제일 먼저 시작하여 가르치게 된 것이었다."

▶▶ 백낙준, 연세와 더불어 한평생

 

백낙준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연희전문은 조선어 사용이 금지됐을 때부터 교수들이 학생들을 모아 국학을 따로 가르쳤고 일제가 식민통치 연구 목적으로 조선어와 조선사를 가르치자 가장 먼저 정규 과목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목적은 당연히 일제의 식민통치 연구에 대항하는 반관학적,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학생을 선발할 때도 민족주의적 성향이 드러난다. 1932년 연희전문은 전문학교 최초로 문과 지원자들에게 조선어 과목을 부과했다. 논술형 문제도 다분히 민족주의적인 의도가 드러나는 것들이었다. 1932년에는 전문학교 입학시험에 조선어 과목이 있었고, 1934년에는 '전문 교육을 받는 조선 청년의 임무를 논하라'는 문제가 출제됐다.

이런 분위기에서 재학생들은 연희전문의 국학 중심적인 성향과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 1930년대 조선어학회의 후원 아래 조선일보가 벌인 문자보급운동을 들 수 있다. 1934년 경성제국대학 재학생은 75, 보성전문 61, 세브란스의전 47명인데 반해 연희전문의 재학생은 무려 191명이 참여한 것을 보면 연희전문이 왜 국학의 본산인지를 알 수 있다.

 

세계화와 개방성

 

학생들에게도 연희전문은 매력적인 곳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유일한 대학이었던 경성제국대학은 일본인 교수가 대부분이었고 일본어로 강의를 듣고 시험을 쳐야 했다.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비율도 1:3 정도였다. 입학도 어렵지만 일본어로 공부해야 하는 환경에서 일본 학생과의 경쟁,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학문을 공부해야 한다는 게 걸렸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이처럼 경성제국대학의 환경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대학에는 가고 싶은 학생에게 종합대학과 다름없는 커리큘럼을 가지고 뛰어난 학자들이 가르치는 연희전문은 최선의 대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관립공립사립전문학교가 농업, 상업, 공업 등과 관련된 실용 학문을 개설할 때 연희전문은 처음부터 문과, 상과, 수물과를 개설하고 학생을 모았다. 일제강점기 동안 전문학교 가운데 문과를 설치한 학교는 연희전문 외에는 숭실전문학교와 이화전문학교뿐이었다. 기독교 학교임에도 종교와 무관하게 학생을 선발하는 개방성 또한 연희전문의 강점이었다.

이렇게 연희전문을 졸업한 학생들에게는 취업과 유학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유학이 선택지가 된 이유는 경성제국대학 외에는 일제로부터 정식 대학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학업에 뜻이 있는 학생은 대학에 가야 했지만 경성제국대학을 제외하면 선택지는 오로지 유학뿐이었고 연희전문은 유학을 가기에 유리한 학교였다. 특히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면 연희전문에 가야 한다는 인식이 생길 정도였다.

 

이 학교 출신은 대개 亞米利加로 유학가는 것이 특색이다. 대체 조선에는 학벌이 두 개가 잇다. 하나는 와세다, 게이오, 메이지 하는 일본계 유학생이요, 다른 한편은 미국을 주로한 구미계 유학생들이다. 그 실력의 여하와 귀국 후 사회에 나와서 활약하는 여부는 다른 기회에 언급하려 하거니와 엇잿든 미국 유학생의 다대수를 점령함이 이 연희전문인데 그러기에 오늘까지 300여 명 졸업생 중 亞米利加 出이 거지 반, 반수 이상은 차지할 것이다.”

▶▶ 「五大學府 出人材 언파렛드, 삼천리4-2, 1932, 23

 

이 기사에 나온 유학생 비율은 과장된 것이다. 1937년까지 졸업생 698명 중 117명이 상급학교*에 진학했는데 그 중 53명이 구미로 유학을 간 정도다. 물론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것 자체가 드물었던 다른 사립전문학교에 비하면 압도적인 수치였기 때문에 연희전문에 대해 이러한 인식을 가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유학을 뒷받침 한 것은 연희전문이 가진 독특한 학풍이었다. 선교사가 세운 학교라서 미국인 교수가 있기도 했지만 조선인 교수진도 구성 자체가 이미 국제적이었다. 문과의 정인보유억겸최현배는 교토제국대학, 백낙준은 예일대학, 현재명은 시카고대학 출신이었다. 상과의 이순탁은 쿄토제국대학, 백남운은 토쿄상과대학, 조병옥은 콜롬비아대학, 홍승국은 오하이오주립대학 출신이고 수물과의 이춘호는 오하이오주립대학, 이원철은 미시간대학을 나오는 등 연희전문의 조선인 교수들의 상당수는 유학파였다. 이들도 학생들과 비슷한 처지에서 외국으로 떠났던 이들이다.

영어를 중시한 커리큘럼도 유학에 유리했다. 1921년에는 문과상과수물과 모두 주 8시간의 영어교육을 실시했고, 영어수업은 매 학년 수업 시간의 약 1/4의 비중을 차지했다. 이런 추세는 학과별 특성에 따라 조정을 거쳤으며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된 1940년 무렵까지 지속됐다. 이렇다 보니 신촌의 강아지도 영어로 짖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유학파 교수진들은 외국의 이론과 학문을 일본을 거치지 않고 직접 수용할 수 있었고 이는 충실한 외국어 교육을 받은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은 연희전문을 당시 가장 세계화된 학교로 만들었고 서구 문물에 친숙하고 개방적인 이미지로 자리 잡게 된다.

 

연희전문의 공기가 자유를 만든다

 

우리대학교의 '자유롭다'는 이미지는 이 무렵부터 만들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로 근대 학문을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유학을 다녀온 교수진이 일본을 거치지 않고 최신 학문을 연구했다. 전문학교라는 이름이 붙어있었지만 실용 교육보다는 학문 연구에 중점을 두었고 경성제국대학의 식민지배를 위한 관학에 맞선 반관학적 학풍의 국학을 발전시켰다. 당시 문과 과장이었던 백낙준 선생은 당시의 학풍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당시 학생들이 연전을 찾아온 이유는 독특한 학풍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민족의 정신이 흘렀으며 여기에서 자유사상이 자랐으며 여기에서 동족애가 용솟음쳤고 여기에서 뜻이 같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백낙준, 연세대 초창기의 학생들

 

학생들은 자유를 찾아 연희전문에 왔고 유학을 통해 근대학문을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교수들은 사상이나 이론으로 대립해도 국학을 발전시키는 데 동의했고 지원했다. 연희전문은 일제강점기에서 하나의 해방구 같은 분위기였다.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만든다.” 연희전문도 그랬다. 연세춘추의 전신 연전타임스가 창간된 것도 이런 연희전문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연전타임스시대의 거울을 직시하라

 

1930년대는 연희전문이 명문으로 발돋움하는 시대였다. 일제의 무단통치가 심화되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연희전문이 빛나던 시기다. 최현배 선생을 중심으로 국어를 보급하고 정인보 선생은 조선사를 연구하며 정약용을 알리는 등 학문적 성과를 내고 있었으며 학생들 또한 사회참여에 적극적이었다. 연전타임스가 창간되기 전 기관지였던 잡지 延禧(연희)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본지의 포부는 眞誠으로 민중을 돕자는 것이다. 詞華보다 학리에 힘을 더하려 하고 논변은 졸할지언정 실득없는 공언은 어디까지 剪除하려고 하였다. 학창에 공부하는 것이 어찌 일신을 위함이랴 남은 결을 먼저 민중에게 바치는 것이 옳고 강단에서 교수하는 것이 어찌 자기를 위함이랴. 쉬는 시일을 또한 민중에게 드리는 것이 옳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이렇게 민족주의 의식을 드러내는 잡지를 온전히 낼 수 없었다. 수물과의 베커 교수가 외국인이라는 점을 활용해 발행인을 맡아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으나 검열이 들어오고 정간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延禧는 결국 학생회 해체와 함께 폐간되었다. 이후 문과상과수물과 3과 학생회가 모여 창간한 신문이 연전타임스. 수물과 32학번 서병훈을 발행인으로 해 193591, 월간지로 탄생한 연전타임스는 우리나라 최초의 학보이자 한글 전용 신문이며 최초로 가로쓰기를 시도한 신문이기도 하다.

연전타임스는 학생들의 소식지이자 학술지였으며 엄혹한 시대임에도 깨어있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정인보 선생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창간사의 제목은 거울()을 겁내는 것은 마인의 증()일 것이며 정당한 자는 거울을 직면할 것이다이다. 학문에 힘쓰면서도 진실을 외면하지 말라는 격려를 담은 창간사는 신문의 성격을 보여준다.

 

연전타임스는 어떤 기사를 다뤘는가

 

▲ 「연전타임스」 창간호 제1면 ▶▶ 1935년 9월 1일 창간된 「연전타임스」 는 대학 신문의 효시이며 학생들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진 순우리말 신문이다.

1면에는 창간사외에도 유억겸, 이순탁, 서강백, 백낙준, 이춘호 선생과 같이 연희전문을 이끈 대학자들의 축사가 이어진다. 특히 이순탁 선생의 창간 축사가 눈길을 끈다. 그는 연전타임스가 가야 할 방향을 지정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신문으로서 학교 소식을 전하고 학교의 정신을 집중하여 뭉치라는 당부와 학생의 연구 성과 발표로 연구심을 배양하고 사회의 현실을 알 수 있는 저널리즘에 대한 강조였다. 구체적으로 연전타임스의 방향을 설정하고 실제 신문의 성격과도 일치한다는 점에서 이순탁 선생이 창간호 발행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2면에서는 학교 소식을 전하고 있다. 첫 번째 뉴스는 도서관에 관한 기사인데 47천 권에 달하는 장서를 보유하며 나날이 약진하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도서구입비 기증자도 언급하고 있다. 농구부의 전조선선수권대회 제패와 도쿄 원정 결산은 가로쓰기로 실려 있다. 문우회 연구부의 역사, 어학, 철학 강좌 개설 소식이 눈에 띈다. 역사는 손진태, 어학은 최현배, 철학은 김두헌 선생이 1년 계획으로 강좌를 개설하여 학문탐구와 진리탐구에 관심이 있는 학생을 모은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실제로 중점을 두는 것은 국학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교육에 가깝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최근의 인문학이 인문학적 상상력이라는 필요로 관심을 얻고 있는 현상과 대비되면서도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원점으로 인문학을 삼았다는 점이 도드라진다.

▲ 「연전타임스」 2면의 농구부 전반기 보고 기사 ▶▶ 연희전문 농부구의 활약을 알리는 기사. 가로쓰기를 한 점이 돋보인다. 전조선 농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고 평양 농구단의 초청으로 떠난 평양 원정에서 전승을 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하게 다루는 기사는 1월에 있었던 도쿄 원정 묘사와 결과 및 비용 정산이다. 아쉽게도 도쿄대에게 73 대 36으로 대패했다.

한편 수물과의 소식을 다룬 기사는 광산과화(鑛山科化)한 수물과 4학년이라는 제목으로 측량법을 배우려는 4학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당시 조선에 불어닥친 골드러시 열풍은 광산 개발을 위한 기술을 필요로 했던 시기였으며 학교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전쟁에 대한 야욕을 숨기지 않던 일본은 국제통화로 통용될 수 있는 금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광업을 장려하며 산금장려정책을 펼쳤다. 이에 따라 1930년에 145건에 불과하던 금은광 허가건수는 19395369건으로 늘어날 정도로 금광 열풍이 불었다. 그런데 기사 제목의 부정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긍정적인 시각으로 광산 개발에 관련된 뉴스를 다루고 있는데, 지금 언론들의 기사 제목 설정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다.

3면은 과학 섹션이다. 연희전문은 문과와 상과가 강한 학교임에도 과학 섹션이 먼저 나온 것은 과학과 합리적 사고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35년 연희전문의 신입생 모집 광고를 보면 문과 50, 상과 90, 수물과 30명이 정원이었다. 여기에 더해 수물과는 1943년과 1944년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졸업생이 20명을 넘은 적이 없을 정도였으니 이런 배치는 과학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박인준과 이성준이 각각 가옥은 인류의 발전을 따라 개량할 것이다인공강우의 음미라는 글을 실었는데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과 그 활용에 대한 고찰이 묻어난다.

전면광고인 6면을 제외한 4~8면은 문예면이다. 여기에는 김대균의 쉴러의 미학론-비판적 소고’, 김도집의 수필 사양(斜陽)’, 홍여해의 오므린 달팽이를 비롯해 창간호를 만든 주역 중 하나인 강영수의 낙산사라는 콩트와 서점 광고 등이 게재되어 있다. 특히 4학년이었던 김대균은 실러에 대한 소논문을 통해 뛰어난 실력을 가졌음을 보여주며 연전타임스가 단순한 소식지가 아닌 학술지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5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이양하의 신록예찬이다. 이 글은 연전타임스창간호에 실려 지금까지도 봄의 캠퍼스를 아름답게 묘사한 글로 널리 읽히고 있다. 7면은 손진태의 찰고(刹考)-솔도파의 원시형과 그 발달에 대한 소고라는 연구글이, 8면은 박성재의 조선대외무역현상론이 차지하고 있다.

연전타임스가 독특한 점은 학생들이 만든 학보임에도 학술지로서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과 교수와 학생이 자신의 연구 성과를 공유하는 매체였다는 점이다. 손진태와 이양하는 교수였고 김대균, 강영수 등은 학생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제대로 된 언론이나 학술지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감안해도 교수와 학생이 학보를 소통의 장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당시 학생들의 수준과 교수들의 개방적인 자세를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연전타임스는 일제의 탄압으로 언로가 막혀있는 상황에서 연희전문 구성원이 단합하고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줬고 그들이 연희전문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방향을 제시해주는 부표였던 것이다.

 

연전타임스34학번, 그리고 홍이섭

 

▲ 연희전문 문과1반 34학번 입학생들. 맨 앞줄 중간에 담당교사였던 외솔 최현배 선생, 오른쪽 뒤에 얼굴이 반쯤 가려진 최영해가 서 있다. <사진제공 최동식 교수>

연전타임스창간 당시 기자였던 조풍연 선생(34학번, 전 한국일보 이사)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창간호를 편집한 사람은 강영수, 최영해, 홍이섭, 조풍연 이렇게 네 사람이었다. 강영수, 조풍연은 졸업 후 언론인으로 이름을 떨쳤고 홍이섭은 사학자로 지대한 공헌을 했다. 최영해는 최현배 선생의 장남이며 출판인이었다. 이들이 연전타임스를 만들 당시는 연희전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을 때다.

 

우리가 이 신문을 만들 때에 처음부터 일관한 정신은 우리가 배우는 학교에 대한 무한한 애착심이었다. 일본 사람 밑에서 중학을 마치고 연전(延專)에 들어간즉 우선 조선말을 마음 놓고 쓰는 것이 좋았다. 교수나 강사들이 참으로 우리를 사랑하는 스승들이며 말 한마디 건네일 때에도 정과 친절이 사무쳐 있었다. 당시의 학생들은 모두 이것을 고맙게 여기었으며 그럼으로써 학교를 사랑하게 되었다.”

▶▶ 조풍연, <연전(延專)타임스 창간 당시>

 

이렇게 학교에서 만나 의기투합한 이들은 지속적으로 관계를 이어간다. 최영해의 아들인 최동식 전 고려대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특히 홍이섭과 최영해의 인연은 남달랐다고 한다. 배재와 양정 출신인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고 후일 홍이섭 선생이 조선과학사를 쓸 때도 최영해 선생이 후원했다고 한다. 출판사 정음사를 세운 최영해는 1944년 도쿄에서 일본어판으로 나온 조선과학사를 해방 후 한글판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홍이섭 선생이 최영해 사장에게 조선과학사를 쓴 이유에 대해 최 교수는 검열이 심해서 우리 것(국학)과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과학사라면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조선과학사는 일제의 식민사학에 대한 반론이자 일제에 저항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야심차게 낸 첫 책을 최현배 선생에게 보여드리자 최현배 선생은 이딴 거는 뭐하러 쓰냐며 책을 던져버리셨다고 한다. 일본어로 된 책이 무슨 의미냐는 것이었다.

연전타임스는 일제의 검열로 인해 꾸준히 간행되지 못했고 창간호 외에는 남아있는 자료가 없다. 이후 중일전쟁, 조선어학회 사건을 비롯한 일제의 탄압으로 연희전문을 이끌던 교수와 학생들이 떠나면서 연희전문은 해방 때까지 암흑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동안 쌓아온 전통과 역사는 해방과 함께 되살아나며 사학의 명문 우리대학교가 탄생하는 토대가 되었다.

 

신촌캠퍼스는 기억을 잇는 공간이다

 

메이저리그 최고 명문 뉴욕 양키스는 가장 많은 27회의 우승과 가장 많은 영구결번**을 보유한 팀이다. 이 팀은 올해 열아홉 번째 영구결번의 주인을 찾았는데 20년간 팀의 간판으로 활약한 등번호 2번의 유격수 데릭 지터가 그 주인공이다. 그의 은퇴와 함께 뉴욕 양키스 선수들은 더 이상 1번에서 9번까지 한 자리 번호를 달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데릭 지터는 베이브 루스(3), 루 게릭(4)과 같은 반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영구결번은 오랜 기간 동안 팀을 이끈 상징과 같은 선수에게 팬과 구단이 선사하는 최고의 헌사이자 존경의 표시다. 팬들은 홈구장에 새겨진 전설들의 번호를 보며 끊임없이 그의 플레이를 기억하고 그가 가져다준 영광을 가슴에 새기며 팬으로서 자부심을 이어나간다.

우리대학교에는 학교의 발전에 직접적으로 공헌한 인물을 기리는 건물이 여섯 채 있다. 우리대학교의 상징인 언더우드관, 언더우드 박사를 기리는 언더우드가()기념관, 광혜원을 설립한 알렌 박사를 기리는 알렌관, 피셔관, 유억겸 기념관, 외솔관, 위당관이다. 원래 대강당 옆에 백낙준 선생을 기리는 용재관까지 일곱 채가 있었으나 현재는 신경영관 건설 문제로 아쉽게 해체된 상태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동안 연희전문을 명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발전시킨 인물들이다. 건물에 인물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건물을 보며 업적을 기억하고 그 인물의 품 안에서 의지를 잇는다는 의미다. 또한 그 건물이 점유하고 있는 공간은 다른 의미가 침범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인물의 이름을 건물에 붙여 기억하는 행위는 영구결번과 비슷한 의미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신촌캠퍼스는 교육을 위한 공간이자 연세의 역사와 기억을 잇는 공간인 것이다.

캠퍼스에 건물을 통해 위대한 선배들의 업적을 기억하도록 하는 것은 다른 학교들이 쉽게 따라하지 못하는 우리만의 특색 가운데 하나다. 어느 대학이나 건물을 기부한 기업이나 기부자의 이름이 붙은 건물은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그 학교의 전통을 세우고 이어나간 이를 건물의 이름으로 기억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오랜 역사를 가진 고려대학교조차 인촌기념관 말고는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한 건물이 없다. 한 가지 우려스러운 점은 우리대학교 또한 다른 학교들을 따라가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용재관 해체는 우리의 전통과 가치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시대의 요청에 따라 새로운 시설이 확충되는 것은 환영해야 할 일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용재의 이름을 어떻게 남기고 이어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재 백낙준의 이름조차 지워진다면 우리는 더 이상 캠퍼스에서 지킬 수 있는 이름이 많지 않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발굴하지 못한 많은 전설들이 있다. 우리 캠퍼스가 이들의 전설로 채워져 학우들에게 연세의 학풍과 기억을 전달해주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 상급학교 : 경성제국대학을 제외하고는 대학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상급학교는 대학을 의미한다.

** 영구결번 : 은퇴한 유명선수의 등번호를 영구히 사용하지 않는 관습 또는 그 번호.

 


정서현 기자
bodowoman@yonsei.ac.kr
특별기고 홍성광 동문(사학·00)

hsksaber@gmail.com

자료사진 연세춘추 아카이브

사진제공 최동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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