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어린 시절 한번쯤 선생님들에게 ‘참 잘했어요’ 스티커를 받았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 스티커는 철저히 순서대로 주어진다. 선생님이 선정한 항목들 중 1등을 하는 아이들에게 최우선적으로 주어지며 한 학년의 마지막에는 아이들이 서있는 등수가 매겨진 계단의 순서에 따라 최종 선물이 지급된다. 이러한 시스템이 우리들에게 1등을 하지 못할 바엔 노력하지 않는 편이 더 편하다는 것을 일찍 깨닫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요즘 우리 젊은이들은 결과로 보이지 않는 것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들은 보잘것없이 추락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회에 기대하지 않으며 변화의 길을 찾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발을 빼는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어쩌면 2010년 지방 선거에서 20대의 투표율이 41.1%로 평균 투표율인 53%를 한참 밑돌았던 현상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투표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는 젊은이들의 냉정함은 자연스럽게 ‘무투표는 또 다른 권리의 행사’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게 되었다.

투표를 하지 않는 것이 정당한 권리의 행사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무투표는 권리의 행사인가’라는 의제에는 두 가지의 오류가 보인다. ‘권리’와 ‘행사’라는 단어와 ‘무투표’라는 단어가 다소 어색하게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로 우리는 ‘권리’라는 단어 자체를 오·남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검토해야 한다. 권리의 사전적인 의미는 ‘어떤 일을 행하거나 타인에 대하여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힘이나 자격’이다. 어떠한 행동을 하는 경우 당사자에게 주어지는 것인데, 정의 자체로 볼 때도 ‘권리’는 ‘무투표’와 연결될 수 있는 고리가 현저히 부족해 보인다. 투표를 하지 않는 것을 자유로운 개인의 행위로 볼 수는 있지만 이 행위로 인해 당사자가 가질 수 있는 자격은 사실상 없다고 해야 알맞기 때문이다. 정치에 대해 무관심할 수 있는 것이 또 다른 자격이라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당사자가 상대방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점에서 이는 너무나도 억지스러운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투표하지 않을 ‘권리’자체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권리의 ‘행사’는 당연히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무투표’를 투표하지 않을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투표할 권리를 ‘포기’하는 행위라고 말하는 것이 무투표의 명확한 해석이 아닐까 생각한다.

두 번째로 투표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치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삶을 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국가는 국민에 의해 생명력을 부여받는데 이 때 국민의 투표권은 국가의 생사를 결정짓는 가장 결정적인 행위로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 국가의 정치는 국민이 국가라는 맹인의 등에 업혀있는 상황으로 비유하여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국민은 투표권을 행사함으로써 자신을 업고 길을 걷는 맹인의 앞길을 알려줘야 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상황에서 길을 걷는 도중 돌에 걸려 비틀거리는 맹인에 대해 철저히 무책임할 수 있을까. 자신의 생명이 직결되어 있는 문제임에도 냉정하게 무관심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투표권의 행사는 비단 정치행위라고 딱딱하게 선을 그을 것이 아니라 국민 스스로가, 특히 젊은이들이 투표권의 행사는 우리 자신의 일상생활과도 직결되는 문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투표권은 자신이 대한민국의 주인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작업이다. 투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꾸만 어긋나는 자녀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고만 하는 즉, 부모이기를 지레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투표를 하지 않는 간단한 방법을 통해 국가의 무능력함과 실패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시도는 그 당시에는 정당한 듯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사회에 대한 책임, 후손을 위한 책임, 그리고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박탈하는 어리석은 행동에 대한 책임은 결국 우리 모두가 함께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고 현명하게 행동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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