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봄은 왔건만 봄 같지 않구나.”(春來不似春)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叫)가 지은 시의 한 구절이다. 시인이 살았던 시공간과는 천년을 훌쩍 뛰어넘는 간극이 가로막혀 있건만, 어쩌면 이 말이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심경을 고스란히 대변해 주고 있는 듯하다. 가끔 사람들은 너무나 끔찍한 일을 당하면 할 말을 잊는다. 어떠한 어휘나 수사를 동원해도 마음속 충격을 표현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필자 또한 이번 참사에 대해서만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다.) 대신 나와 내 주변의 상황을 애써 차분한 심정으로 한번 되돌아보고 싶다.

 
2. 예로부터 중국 사람들은 ‘기미’(幾微)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기미’란 어떤 사건이 표면 위로 떠오르기 이전의 은밀한 징조 같은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와 관련해 『주역』 곤괘의 문언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선을 쌓은 집은 반드시 넘치는 경사가 있고, 불선을 쌓은 집은 반드시 감당치 못할 재앙이 있다. 신하가 그 임금을 죽이며, 자식이 그 아비를 죽임이 하루아침 하루저녁에 원인된 것이 아니다. 그 말미암아 온 바가 점차 커진 것이다. 분별할 것을 일찍 분별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주역에 말하길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이 이른다’고 하니 대개 순리대로 일이 진행됨을 말함이라.” 주어진 인용문의 논리대로라면 이번 세월호 참사 또한 우리가 ‘분별해야 할 것을 일찍 분별하지 못한’ 때문이다. 물론 이제 와서 엎지른 물을 앞에 두고 한탄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금이라도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고 남은 실종자가 모두 구조될 때까지 온 국민이 합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나만의 생각일까? 지난달 발생한 세월호 참사 이후 <대한민국 호>가 채 전열을 가다듬지도 못한 상태에서 다시 제2의 ‘맹골수로’를 향해 뒤뚱거리며 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국론은 분열되어 도처에는 상대에 대한 폭언과 근거 없는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그 와중에 유가족들의 마음은 치유불능의 상태로 시커멓게 타들어 갈 뿐이다.
 
3. 이번 학기 필자는 학부 수업에서 학생들과 유교 경전을 같이 읽고 있다. IT 최강국을 자처하는 대한민국의 명문 사학에서 케케묵은 공자 사상을 공부해 보겠다고 수강 신청한 학생이 20명을 넘어선 것도 경이적인 일이지만, 학생들이 진지한 태도로 경전을 읽어나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자못 대견스럽다. 『중용』에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활쏘기는 군자와 유사한 점이 있으니, 과녁을 맞추지 못하면 돌이켜서 그 자신에게서 잘못을 찾느니라.” 필자는 솔직히 이 비유적 표현 속에 우리 시대의 모든 문제가 집약적으로 내재해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일단 문제가 발생하면 그 모든 원인을 ‘나’ 밖에서 찾고자 한다. 그러다보니 도처에는 사회의 죄악을 규탄하는 정의의 사도들이 난무하지만, 정작 골방에서 애통해하며 스스로를 반성하는 무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는 필히 두 개의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20세기 중국의 문호였던 루쉰의 고백처럼 ‘우리는 야만적 식인주의가 판을 치는 사회에서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인 것이다.’ 사람의 눈은 밖을 향해 있으니 ‘내’가 보고 있는 세계 속에 <나>는 없다. 그런데 그 내가 보고 있는 세계가 실은 내 마음이 조작한 환영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대학은 필경 그 세계를 창조한 ‘마음’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다. 그런데 소위 대한민국 미래의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우리 대학이 언젠가부터 ‘국제화’, ‘융복합’ 운운하면서 인문학은 슬그머니 찬밥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4.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에게는 기술문명이 대체할 수 없는 어떤 고유한 영역이 있다. 만일 국내 유수 대학들이 그러한 부분을 간과한 채 인문교육을 그야말로 교양적 지식인을 양성하기 위한 ‘교양’ 수업 정도로 치부하는 이상, 제2·제3의 세월호 참사를 경고하는 ‘기미’는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무엇보다 학생들 간에 무한 경쟁을 임의로 부추겨 내가 앞서기 위해 남을 무참히 짓밟을 수 있는 인재를 훈육하는 식의 교육은 필히 재고되어야 한다.『중용』에 따르면 ‘사람이 모두 저마다 지혜롭다 말하지만, 그물과 덫과 함정으로 몰아넣어도 피할 줄을 모른다.’ 오늘날 대학 교육이 혹여 학생들에게 실용지식을 가르친다는 명목 하에, 젊고 혈기 왕성한 후학들로 하여금 덫과 함정에 빠지도록 종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 런지? 원고를 청탁받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부터가 깊이 반성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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