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웰슬리대학, 페미니즘과 진보적 사상을 지닌 한 미술사 교수가 강사로 부임한다. 캐서린 왓슨 선생님, 그녀는 일과 삶에서 인간을 옭아매는 보수적 틀을 깨고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새로운 길을 걸어가려는 의지를 지닌 인물이다. 그녀는 첫 강의에서부터 학생들과 부딪히는데, 중상류층 가정에서 보수적인 교육을 받고 똑똑한 모범생으로 성장해 온 웰슬리의 여학생들은 미국의 전통적인 중상류층의 문화적 가치를 내면화한 도덕의 수호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모나리자 스마일>의 이야기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곧 자신의 지위라고 믿는 베티는 명문가 출신의 남성을 만나 재학 중 결혼한다. 집을 아름답게 꾸미고, 한 손으로는 남편의 와이셔츠를 다리며 다른 한 손으로는 책을 펴고 읽을 수 있다는 꿈을 가진 베티는 그러나 남편의 외도 앞에서 좌절한다. 반대로 왓슨의 가장 우수한 학생으로 커가며 법학 대학원 진학을 앞둔 조안은 졸업식장에서 결혼을 선언한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여성의 행복은 가정에서 얻는 것이라고 굳건히 믿었던 베티는 이혼 후 대학원에 진학해 자신이 그토록 맞서 싸우던 왓슨 선생님의 길을 따른다. 조안은? 알 수 없다. 결혼 후 멀리 떠난 조안이 그 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영화는 언급하지 않는다.
60여 년이 흐른 지금 한국사회의 젊은 여성들은 어떤 길을 가고 있는가? 자의식을 가진 많은 여성들은 더 이상 성별 고정관념에 묶여 있지 않은 것 같다. 남성들과 나란히 학업에 몰두하고 직장을 얻고 월급과 승진에 일희일비하는 삶을 자신의 미래로 생각하는 것 같다. 20대의 고용률이 역사상 처음으로 40% 밑으로 떨어졌다는 기사가 보도된 지 며칠 후 20대 여성의 고용률이 남성의 고용률을 넘어섰다는 보도가 인터넷을 달군다. ‘알파걸’이라고 불리는 능력 있는 젊은 여성들이 각종 고시의 수석을 차지하고 대학 신입성의 과반수에 이른 것도 꽤 오래된 이야기다.
그렇다면 한국의 젊은 여성들은 그녀들의 엄마 세대와 비교하여 더 큰 가능성과 기회를 얻게 된 것일까? 그들은 별다른 장애 없이 노동시장에 들어가고 남성과 같은 경력의 사다리를 올라가 마침내 경제적 성공과 사회적 인정을 얻는 안정된 지위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 글을 읽는 20대의 여성들 중 많은 이들은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어쩌면 화를 낼 지도 모르겠다. 지금 어느 나라 이야기를 하는가하고?
오히려 ‘88만원세대’, ‘잉여세대’, ‘취업난민세대’라고 이름 붙여진 20대의 많은 여성들은 졸업 후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무엇을 하며 인생을 채워가야 할지 고민하며 밤을 지새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기업 신입사원의 연령이 남성이 33세가 넘고 여성도 28세가 훨씬 넘는다는 보도가 알려주듯이, 소득과 고용이 보장된 일자리를 얻기 위해 졸업 후에도 4-5년씩 취업준비를 해야 하는 20대의 상황은 여성에게 훨씬 더 가혹할 수 있다. 노동시장의 성차별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국사회에서 남성보다 훨씬 더 적은 기회에 도전하기 위해 불확실한 투자를 계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노동시장에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결혼과 가족이라는 또 다른 생애과정의 책임이 기다리고 있다. 한국의 20대 여성들에게 베티와 조안이 부닥쳤던 결혼과 가족 돌봄의 의무는 선뜻 들어서기도, 그렇다고 그냥 지나쳐버리기도 두려운 삶의 우회로(迂廻路)로서 여전히 강력한 규범적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얼마 전 TV의 한 짝짓기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여성출연자의 자살은 ‘씩씩하고 당당할 것만 같은’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연애와 결혼이라는 문화적 각본의 압력 앞에서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학교를 졸업하고 그럭저럭 직장생활은 하지만 제 때에 결혼하지 못하고 ‘골드미스’― 경제적으로도 큰 여유가 없기 때문에 ‘골드’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것도 아니다―로 살아가야 하는 불투명한 미래 앞에서 여성들은 실망하고 절망한다.
'알파걸은 있어도 알파우먼은 찾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20대 여성은 어떤 길을 어떻게 걸어야 할까? 먼저 혼자 있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비슷한 고민을 가진 친구들과 함께 모여 속마음을 털어놓고 귀를 기울이자. 적어도 기성세대의 어설픈 힐링보다는 위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사회’에 대해서 좀 더 많은 관심을 갖기를. 내가 어떤 사회, 어떤 제도 속에 살고 있는가가 나의 삶의 많은 부분을 규정한다. 나의 삶의 불확실성을 수정하려면, 내가 사는 사회 속의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 우리가 자기계발에 쏟는 에너지와 시간의 1/10, 아니 1/100만이라도 ‘사회’의 문제로 옮겨본다면, 길은 좀 더 뚜렷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낼 지도 모른다. 아니 나 스스로 그 길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길은 내가, 20대 여성들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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