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러시아 소치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이 끝났다. 이 커다란 이벤트 끝자락에서 펼쳐진 여자 피겨스케이팅 경기는 그 자체로도 드라마틱했을 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민족주의의 여러 단면을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상상의 공동체’라 불리곤 하는 민족은 근대세계의 역사적 행보에서 핵심적 단위를 이루어 왔다. 원초적인 집단 충성심을 가정하는 민족주의는 동시에 그것을 끊임없이 학습시키는 거대한 시스템이기도 하다. 따라서 민족주의는 근대성이 배태한 모순만큼이나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고, 비판과 해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어느 학자는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라고 불렀을 정도이다.
   이번 김연아의 은메달 판정이 불러일으킨 반향을 두고 일부 신문의 사설과 블로그의 글들은 민족주의, 국가주의, 나아가 성과제일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한 결과라는 시각에서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런데 미국의 <뉴욕 타임즈>는 2월 23일자(현지시간) 기사에서 이번 은메달 사태에 대해 한국 국민들이 과거와 달리 과도한 민족주의 경향을 보이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그 기사는 그동안 한국이 보여 온 스포츠 성적에 대한 엄청난 집착이 다른 나라들로부터 피해를 입은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전제한다. 6.25 이후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국가는 내부적 단합을 위해 적극 민족주의를 활용해 왔고, 그것이 표피적으로 드러나는 사건들이 올림픽과 같은 국제경기였다. 하지만 이제 한국 국민들은 김연아의 결과에 분노하면서도 과격함 대신 이성적인 지적과 자기반성의 자세를 보이고 있음을 주목한다. 즉 거친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성숙한 태도를 갖추게 되었다는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변화라는 것이 그렇게 완전히 긍정적인 이야기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변화의 이면에 또 다른 민족주의의 단면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이번 판정과 관련하여 많은 기사들이 러시아를 ‘마피아’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짚어보자. 러시아=마피아라는 수사는 한국뿐만 아니라 서방세계의 기사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마피아’는 가장 전형적으로 전근대성을 표상하는 집단이다. 폭력, 담합, 절대복종, 비합리성 등 그야말로 이성을 앞세운 근대세계의 이상에서 대척점에 위치하는 모든 부정적 요소들의 총화이다. 따라서 러시아를 마피아라고 부르는 일은 후진적 러시아와 그들의 비합리성을 비난할 수 있는 선진적 국가라는 배타와 차별의 민족주의적 단면을 드러낸다.
  인터넷 청원을 다룬 기사에서도 민족주의 수사는 작동하고 있다. 판정의 공정성과는 별도로, 인터넷 등을 이용하는 분야에서 러시아는 결코 IT 강국인 한국을 이길 수 없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더 문명화된 한국과 덜 문명화된 러시아의 대결이 되는 셈이다. 결국 김연아의 은메달을 둘러싼 논란에 나타난 한국의 성숙한 자세라는 것은 좀 더 선진적인 우리, 좀 더 문명화된 우리라는 다른 차원의 민족주의의 표출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사실 역사적으로 낯설지 않다. 서구세계가 전 지구를 대상으로 제국주의를 펼쳐갈 때 내세운 모토는 ‘문명화 사명’ 혹은 ‘문화의 전파’였다. 민족주의의 수사가 때로는 아주 세련된 형태로 나타나며, 그리고 아주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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