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인 컨설팅그룹 여준영 대표를 만나다

여준영 프레인 대표는 생각한 것과 다른 사람이었다.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사진 찍는 것을 극구 사양해서 나서는 것을 싫어하는 ‘샤이보이’를 기대했지만 인터뷰에 응한 여 대표는 매우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여 대표는 PR 컨설턴트 회사인 프레인(PRAIN)의 설립자다. 직원 두 명과 작은 임대사무실에서 시작한 프레인은 현재 국내 굴지의 홍보컨설팅그룹인 PCG(Prain Consulting Group)가 됐다. 여 대표는 PCG의 ▲김무열, 류승룡, 오상진 등이 속해 있는 매니지먼트 회사 프레인 TPC(Talented People Cared) ▲디자인 창작집단 스티키몬스터랩 ▲영화 『50/50』, 『아워이디엇브라더』등을 론칭한 프레인무비 ▲프레인사옥에 위치한 레스토랑 퓨어아레나 등을 맡고 있다.
 

 

‘결핍’ 을 극복하는 그만의 방법


그는 유복하고 풍요로운 유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고 2가 되던 해,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이 시작됐다. 경제적 결핍뿐만 아니라 꿈, 비전, 목표도 없던 그 시절을 그는 ‘결핍’이라 정의한다. 지금도 여 대표는 뚜렷한 꿈과 목표가 없다. 그는 “꿈이나 목표가 없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박하게 평가하고 자신감이 결여돼 있기 마련인데 나도 그런 편”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이렇게 자신감이 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잘하는 것에 집착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그의 이런 자신감 결여는 그가 PR에 집착하게 했다. 그리고 그 집착의 결과, 그는 PR계에서 최고가 됐다. 

대학생이 돼서도 경제적 어려움은 계속됐다. 우리대학교 응용통계학과에 입학한 후로 4년 내내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과외를 했다. 그렇게 힘들게 번 돈을 술을 마시는 데 다 써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 시절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친구들과 어울렸던 것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인정한다. 여 대표는 “자신의 취향을 알고 감을 키우는 것이 중요한데 대학 때 놀았던 시절이 나에겐 큰 도움이 됐다”며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공부에만 너무 힘쓰지 말고 그 당시에 할 수 있는 공부를 하라”고 충고했다.

그는 행동파다. 생각이 많지만 하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 행동으로 옮기는 데 망설임이 없다. 대학시절 여 대표는 영화감독이 되겠다며 학교를 자퇴할 생각으로 충무로의 작은 영화 제작사에 들어가기도 했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던 그에게 학교는 2순위였다. 그런데 당시 영화감독이 되려면 거쳐야 할 서브조연출, 조연출 등의 과정에 15년이 걸리는 것을 알고는 ‘이건 아니구나’ 하고 느꼈다. 때마침 영화아카데미가 생겼다. 사람들이 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가면 2년 만에 영화감독이 될 수 있다고들 말했다. 하지만 당시 아카데미 지원 자격이 대학졸업자 이상이었다. 할 수 없이 학교로 다시 돌아온 여 대표에게 자퇴 신청이 잘못됐던 것은 다행인 일이었다. 그렇게 영화감독에 대한 도전은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우연히 시작한 RP에서 길을 찾다


학교로 돌아온 여 대표는 ‘내가 돈도 없고, 취업도 못하면 정말 별 볼일 없겠구나’하는 생각에 공부를 시작하고 취업을 준비했다. 여 대표는 코오롱에 들어갔다. 코오롱이 대기업 중 유일하게 성적증명서를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면접을 본 이튿날 사내 핵심부서인 기획조정실에서 여 대표에게 연락이 왔다. 기획조정실에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이 제안에 그는 응했고 기획조정실의 홍보팀에서 사보를 만드는 일을 담당하게 됐다. 그는 당시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일이 힘들거나 어렵지도 않고 사보를 만들다 보니 꼬박꼬박 원고료도 들어왔다. 어느 날, 여 대표보다 한 살 어린 상사가 그에게 ‘너 대학도 좋은데 나온 애가 이렇게 회사 사보나 만들면서 살거야?’라고 말을 던졌다. 이에 여 대표는 “내가 어때서? 나 잘 살고 있는데”라고 대답했지만 ‘내가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는 보도 자료를 쓰게 됐는데 반응이 꽤나 좋아 홍보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후 퇴임사, 취임사를 쓰는 등 PR 담당 업무를 처음으로 시작했다.

더 좋은 조건의 제안을 받아 작은 회사로 자리를 옮겼던 여 대표는 그곳에서의 회사 생활 역시 마무리하고 다른 회사의 PR을 맡아 프리랜서로 일하게 된다. 일을 하는데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서 아르바이트생을 구했고, 그 아르바이트생은 현재 프레인의 사장이 됐다. 두 명이 시작했지만 두 명이 세 명, 네 명으로 점점 늘어났다. 함께 일하던 직원들은 ‘직장’을 필요로 했고 직원들은 어느 날 여 대표에게 ‘비전’을 제시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비전’이 없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여 대표는 근로자의 날인 5월 1일, 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고는 ‘직원은 30명을 넘지 않는다. 이렇게 일하다 보면 10년 후에는 외제차 탈 수 있지 않겠냐’는 식의 ‘형이상학적인 비전’을 제시했다. 이렇게 ‘회사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임대공간에 작은 사무실을 두고 일을 했는데 수익에서 200만원씩 월급을 나눠 갖고 남은 돈을 저축해 1년 정도가 지나자 1억 원이 모였다. 그 1억으로 좀 더 넓은 사무실로 바꾸고, 사람이 더 필요해 직원 수가 늘어나다보니 지금의 프레인 그룹이 됐다. 지금 뒤돌아보니 작은 사무실에서 제시했던 여 대표의 ‘형이상학적 비전들은 대부분 이행됐다. 프레인이 10년째 되던 해, 그는 프레인의 창립을 함께 했던 직원들에게 외제차를 한 대씩 사줬다. 딱 하나 이행되지 못한 비전이 있다. 작은 규모를 유지하겠다던 그의 계획과 달리 지금 프레인의 직원은 서른 명을 훌쩍 넘었다.
 

사람으로 만들어지고 사람으로 성장한 프레인

 
   
 
 
 

그는 ‘창업을 해야겠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한 적이 없다. 지금처럼 큰 규모의 그룹을 바란 적도 없다. 그의 프레인은 물 흐르듯이 만들어졌다. 프리랜서로 전향해서 아르바이트생을 구하게 된 것도 지인의 제안과 소개였고 그렇게 모인 사람들을 위해 프레인을 만들었다. 점점 사업의 영역을 넓혀간 것도 사람에 의해서였다. 물론 일을 하며 안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지만 그를 스쳐지나간 사람들 중 진정한 ‘내 사람’으로 남은 사람도 많다. 초기 프레인 멤버들은 현재 프레인 그룹의 임원진이 됐다. 큰 그룹을 협업하여 움직이고 있는 그들이지만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1년에 2, 3번 정도뿐이다. 그래도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있다. 이렇게 서로를 믿으며 일할 수 있는 것은 개개인 모두 회사에 대해 주체성을 갖기 때문이다. 여 대표는 이들을 “내가 오늘 당장 부도가 나도 재기하고 싶다며 도와달라고 요청하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날 믿고 따라와 줄 사람들”이라며 그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의 직원에 대한 애정은 그가 진행했던 프로젝트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여직원을 위해서는 수제 구두 ‘펜네’를, 남직원을 위해서는 특별 정장라인인 ‘프레인 라인’을 만들어 선물했다. 제일모직과 함께 진행한 ‘프레인 라인’은 일반 판매용도 함께 제작 됐는데 저렴하지 않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완판’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최근에는 프레인TPC 직원을 위해 제주도에 ‘프레인제주담백하우스’라는 작은 창작공간도 마련했다. 이렇게 직원들을 챙기는 여 대표는 사람을 ‘벤처’라고 정의했다. 사람은 투자에 있어서 가장 리스크가 크지만 그만큼 투자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가령 내가 책상을 사는 데에 투자를 했다고 한다면 책상은 어디 도망가거나 갑자기 변심해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지,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투자를 멈출 수는 없다. 사람이 한번 꽃을 피우면 그 가치는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이 남자가 살아남는 법, 콘텐츠


PR분야에서 최고라 할 수 있냐고 질문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여 대표에게서 “그런 걸로 하자”는 답변이 돌아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프레젠테이션에서는 한 번도 져 본적이 없다”고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는 자신감에 차있다. 그의 PT의 비결은 ‘콘텐츠’다. 그는 “상황에 따라서 주머니에 손을 꼽고, 삐뚤게 앉아서 PT를 한 적도 있지만 실패하지 않았던 것은 PT의 내용, 즉 콘텐츠가 좋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나운서처럼 말은 잘하지만 아무런 내용이 없는 사람과 어수룩하게 말하지만 꽉 찬 콘텐츠를 가져온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콘텐츠가 우수한 사람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글을 잘 쓰는 비결이 뭐냐는 질문에도 ‘콘텐츠’라는 똑같은 답변이 따라온다. 그는 글을 잘 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트위터에는 팔로워들이 줄을 서고 페이스북 친구들도 넘쳐난다. ‘헌트’라는 예명으로 운영하고 있는 그의 블로그는 일상적이지만 가볍지 않은 글로 사람들을 이끈다. 그는 글을 잘 쓰는 비결을 예를 들어 설명했다. 두 사람이 ‘주말’이라는 같은 주제로 글을 쓴다고 가정해 보자. 한 사람은 주말을 작은 방에서 보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우주여행을 다녀왔다. 한 사람은 방에 앉아서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려나가고 우주여행을 다녀온 사람은 그 경험을 두서없이 적는다. 사람들은 누구의 글에 더 흥미를 느낄까? 서툴러도 우주여행을 다녀온 사람의 글이 흥미를 끌 것이다. 그에 의하면 ‘글 솜씨’가 아니라 ‘글을 쓸 재료’가 더 중요하다. 여 대표는 “글을 잘 쓰고 싶으면 책상에 앉아서 국어공부를 할 게 아니라 우주여행까지는 아니더라도 뭐라도 하라”고 충고한다. 

“해야 하는 생각”이 아닌 “떠오른 생각”을 잡자


그가 지금까지 해낸 프로젝트의 출처는 그의 ‘생각’이다. 누구나 24시간 생각을 하지만 여 대표는 강박적으로 그 생각에 몰입하고 집착한다. 한밤중이라도 업무와 관련된 생각이 떠오르면 바로바로 직원에게 메일을 보낸다. 24시간 생각을 열어두는 것이다. 한 달 후의 프로젝트를 위해 ‘어떻게 하면 더 좋게 바꿀 수 있을까?’하고 의문을 던진 후 한 달을 생각한다. 하지만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은 수십 년에 걸쳐 만들어진다. 본질적으로 생각의 질이 다른 것이다. 그는 ‘해야 하는 생각’이 아닌 ‘떠오르는 생각’을 붙잡을 줄 안다.

여 대표에게 지금 그의 삶에서 넘치는 것과 부족한 것을 꼽아달라고 질문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넘치는 것으로는 호기심과 기회를, 부족한 것으로는 시간을 꼽았다. 그는 “20대가 기회가 많다는 것은 어른들의 거짓말”이라고 말하며 영화배우에게 시나리오가 들어오는 것에 빗대어 이를 설명했다. 이제 막 데뷔해서 잘 알려지지도 않은 신인과 인기와 실력이 검증된 스타 중 어떤 배우에게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올까? 여 대표는 “대학생들은 기회가 별로 없다”며 “다만 그 기회의 씨앗이 될 수 있는 시간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물론 요즘 대학생들도 바쁘게 산다는 것은 알지만 대학생들이 죽지 않기 위해 꼭 해야 하는 것은 먹고, 자는 것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진정한 ‘어른’이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여 대표에게는 먹여 살려야 하는 가족과 직원들이 있고 어제 성사시킨 계약이 있다. 그는 “천 명의 직원이 있는 기업을 이끌고 있다면 그 천명 분의 이익을 창출해야할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 또 하나 많은 것은 ‘책임’인 것이다.
 

여 대표는 마지막으로 대학생들에게 “지금도 잘 하고 있고 앞으로도 다 잘될 것”이라며 불안해하지 말라는 말을 전했다. 내일을 보장해 주는 것은 열심히 산 오늘이다. 꿈과 목표가 없다고 불안해하며 시간을 허비하기보다는 하루하루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가치 있지 않을까?

 

최지연 기자
geechoi@yonsei.ac.kr
사진 출처  Prain f 홈페이지
http://f.pra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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