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손범수의 청춘을 들어보다

 우아~ 우아 우아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일요일 오후면 모든 가족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던 이 오프닝 노래를 기억하는가. 지금은 모두의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원조 국민 프로그램 『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그 중심에는 늘 한 남자가 있었다. 바로 재치 넘치는 진행과 특유의 성대모사 능력으로 시청자들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한 우리대학교 경영대 82학번 동문 손범수 아나운서다. 지난 1997년 프리랜서 선언 이후 전문 MC로 활약하며 대중들에게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손 아나운서. 그는 어떤 인생을 살아왔을까.
 

문 닫고 들어간 YBS?
 
  손 아나운서의 대학생활 중 8할은 연세교육방송(아래 YBS)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내기 시절 YBS에 입사한 계기는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그는 YBS 라디오 방송을 처음 접한 순간을 회상했다. 동아리 박람회가 없던 그 시절, 대부분의 동아리들은 새내기들을 데려오기 위해 백양로를 홍보 플래카드로 메웠다. 손 아나운서도 그 시절의 새내기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무미건조한 고교 생활에서 겨우 벗어난 시기였기에 신선한 경험에 대한 갈망은 커져만 갔다”고 입학당시를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의 눈을 사로잡는 동아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던 그에게 YBS는 운명처럼 찾아왔다. 손 아나운서는 “백양로를 걷는데 YBS 남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며 “그 목소리는 마치 YBS로 오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고 흥분됐던 당시의 순간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그에게 부담이 됐던 것일까? 선뜻 용기를 낼 수 없었다. 그는 “4차까지 이어지는 단계별 수습시험도 문제였지만 소심했던 성격에 공식 언론기관이라는 타이틀도 부담이었다”며 “결심하고 후에도 수습 모집 데스크 앞을 몇 번이고 서성였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가방 속에서는 이미 작성이 끝난 수습지원서가 점점 꼬깃꼬깃해져 갔다. 망설임 끝에 그는 수습 모집이 끝나기 1시간 전 매일 가지고 다녔던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것이 바로 ‘아나운서 손범수’가 내딛은 첫 걸음이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까다롭기로 유명한 YBS 면접시험에 붙은 비결이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그는 장황한 설명 대신 노래 한 곡으로 답했다. 송창식의 「맨 처음 고백이란」의 한 구절을 자신 있게 부르는 그의 모습에서 그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유쾌하게 노래를 마친 뒤 그는 “사실 많은 부분이 기억나진 않지만 최종면접에서 자신감 있게 노래를 부른 것이 긍정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며 수줍게 말을 이어갔다.
  다수의 동아리를 거치는 대부분의 대학생과 달리, 손 아나운서는 YBS에서 수습국원, 정국원, 아나운서 부장을 거쳐 국장의 자리까지 오른 한 우물쟁이였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YBS에 남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는 “마이크를 처음 잡았을 때의 설렘과 소중한 인연 때문”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멀리 돌아왔지만
 
  대학생활 4년 내내 아나운싱에 빠졌었던 손 아나운서였지만 그도 처음부터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꿈꿨던 것은 아니다. 손 아나운서는 “졸업할 때만해도 전공인 경영학을 살릴 수 있는 진로를 생각했다”며 “그런데 졸업 후 공군 장교로 복무하던 어느 날 뉴스에서 우연히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고 처음 아나운서에 대해 생각한 계기를 회상했다. 바로 손 아나운서가 YBS 국장으로 활동하던 시절 고려대 방송국의 국장으로 활동한 친구였다. 깔끔한 수트차림으로 뉴스를 진행하던 친구에게서 더 이상 옛날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순간 ‘나도 한번……?’이라는 생각이 손 아나운서의 머릿속을 스쳤다. 제대를 목전에 두고서야 처음으로 아나운서라는 진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유명 방송국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선배의 말을 들어보니 경쟁률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며 “현실은 생각보다 녹록치 않았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아나운서만을 생각하는 건 위험부담이 클 것”이라는 선배의 조언에 따라 일반 대기업에 지원했고 선경그룹(지금의 SK그룹) 정유계열사인 선경유공의 신입사원으로 합격했다. 만약 손 아나운서가 여기서 안주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지금 대중에게 사랑받는 아나운서 손범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입사원 연수 전날 밤에도 시사상식과 언어 교재를 챙겼다”며 아나운서에 대한 미련을 끈을 놓지 못했던 시절을 말했다.
  3개월간의 기나긴 신입사원 연수가 끝나가던 지난 1989년 10월 말, 그는 동기들과는 조금 다른 앞날을 계획하기 시작한다. 당시 선경유공의 본사는 방송사들이 즐비한 여의도에 위치해 있었고, 신입사원은 주로 본사로 배정받기에 그는 중간 중간에 아나운서 시험을 보러 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인생은 알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라 했던가. 운명의 장난처럼 손 아나운서는 많고 많은 신입사원 중에 소수만 배정받는다는 울산 정유공장으로 발령받게 된다. 동기들이 울산공장으로 향하던 날 손 아나운서는 인사팀장에게 찾아가 본사로 발령을 내달라고 당돌하게 말했다. 그는 "지금 생각해보면 일개 신입사원이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했다"며 "하지만 그 시기엔 너무도 절박했다"고 패기 넘치던 젊은 시절을 떠올렸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그의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손 아나운서는 너무도 간절했지만 모집공고도 나지 않은 방송사에 모든 것을 걸기에는 부담이 컸다”며 결국 울산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씁쓸함을 이야기했다.
  이미 마음이 떠났기 때문이었을까. 공장에서의 바쁜 생활은 답답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이에 손 아나운서는 “설상가상으로 공장 인사부장 마저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겨 더욱 괴로웠다”고 말했다. 그런데 부모님으로부터 뜻밖의 소식이 들려 왔다. 바로 그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KBS 신입사원 모집 공고가 발표된 것이다. “내 고민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아버지가 입사지원서를 받아오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으셨다”며 미련 없이 울산을 떠나기로 결심한 계기를 말했다. 하루 늦게 내려온 것도 모자라 사흘 만에 집에 간다고 했을 때 그를 못마땅해 하던 인사부장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어디 한번 잘해봐”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손 아나운서는 “그의 말이 자극이 돼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된 것 같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홀가분하게 서울로 돌아온 그는 방송사 시험을 보름 앞두고 때 아닌 벼락치기에 돌입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인사부장의 예상을 뒤엎고 그 해 12월 당당히 KBS의 신입 아나운서가 됐다. 그는 “긴장이 풀린 탓이었는지 합격 직후 대상포진을 크게 앓았다”며 주위의 축하도 제대로 즐기지 못한 채 보낸 입사직접의 웃지 못할 한 달에 대해 이야기했다
 
꿈의 끈을 놓지 마라.
 
  손 아나운서는 KBS 입사 7년 후인 1997년 3월, 프리랜서 선언을 하게 된다. “방송사의 울타리 안에서 전문 진행자로서의 입지를 다져온 터라 주변에선 모두들 염려스러운 반응을 보였다”고 당시에 대해 말했다. 손 아나운서 역시 전문 진행자로서 자신의 능력을 더욱 특화시키고 싶었지만 현실이 걱정스러운 것은 마찬가지. 흔들리던 그를 잡아준 건 아내 진양혜 아나운서였다. “옹졸하게 생각하지 말고 큰 그림을 보라”는 아내의 말은 그에게 큰 힘이 됐다고 한다.
  진 아나운서의 선견지명이었을까. 손 아나운서는 프리선언 후 지금까지 15년 동안 방송계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또한 그는 방송계에만 머물지 않고 활동 영역을 넓혀 끊임없는 도전을 이어오고 있다. 손 아나운서는 “유니세프와 글로벌케어 등의 NGO 단체에서 꾸준히 활동해오고 있다”며 “현재는 유니세프의 특별대표 겸 이사직을 맡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이런 활동을 꾸준히 할 수 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가장 인상적인 활동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1998년 여름 글로벌케어의 의사봉사단과 함께한 베트남 봉사가 기억에 남는다”고 답했다. 1년의 휴가를 내고 하노이의 구순구개열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온 저명한 의사들을 보며 그는 “사랑과 배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또한 최근에는 교육에도 영역을 넓혀 우리대학교 강단에서 ‘말하기와 토론’이라는 필수교양과목을 맡아 학생들과 소통하고 있다.
 
  손 아나운서가 방송계에 입문한지도 20년이 훌쩍 넘었다. 대학시절 그저 아나운싱이 좋아 방송에 발을 들였던 한 청년은 어느덧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진행자가 됐다. 삶의 모든 고민에 순간에서 그는 꿈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꿈을 좇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긍정적인 에너지 덕분”이라며 “신중하게 고민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는 그가 방송 활동을 꾸준히 이어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청자들과 기쁨, 웃음 그리고 행복 등을 나눌 수 있는 것이 그의 긍정 에너지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 고민이 많은 당신이라면 걱정을 잠시 내려두고 그의 프로그램을 보는 건 어떨까. 손 아나운서의 유쾌함이 당신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줄 것이다.
 
 
 
글 남채경 기자
skacorud2478@yonsei.ac.kr
사진 김경윤 기자
sunnynoon@yonsei.ac.kr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