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色)[명사]

빛을 흡수하고 반사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사물의 밝고 어두움이나 빨강, 파랑, 노랑 따위의 물리적 현상 또는 그것을 나타내는 물감 따위의 안료
 
  색의 사전적 정의다. 한 두 문장으로 결코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은 사전에 있는 모든 단어가 마찬가지 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색’은 더 그러한 것 같다. 물리적 현상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면, 나는 색을 ‘즐거움’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무엇인가에 색을 칠하는 과정 자체가 사람을 즐겁게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 색에 대한 이 고찰이 잘 이해하기 어렵다면, 어릴 적 자주 했던 색칠 공부 스케치북을 떠올려보자. 흰 도화지에 검은색 선으로 그려진 도안들에 형형색색의 색연필과 크레파스로 색을 입힐 때의 그 희열을 기억하는가? 
 
  똑같은 흑백의 그 도안지는 색을 통해 나만의 그림으로 다시 태어났다. 마치 무생물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듯한 느낌이랄까. 뭐, 생명력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대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색칠’이라는 과정 자체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음은 확실하다. (지루한 수업시간, 교과서 속 ‘ㅇ’이 들어가는 글자마다 색깔 펜으로 칠하면서 무료함을 해소했던 것, 다 알고 있다.) 그래도 갸우뚱 할 당신을 위해 색의 힘을 한 번에 보여주는 예를 가져왔으니, 바로 Color Me Rad(아래 컬러미라드)라는 이색 마라톤이다.
 
“잠시만요~뛰기 전에 먼저 색가루 던지고 가실게요~”
 
  지난 7일 한국에서 두번째로 열리는 컬러미라드가 인천문학경기장에서 열렸다. 이 'Color Me Rad'는 다른 마라톤 대회와 색깔부터(?) 남다르다. 5km 단일 마라톤 대회인 이 행사는 기록을 세우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다. 기록에 연연하기보다는 서로서로에게 색가루 폭탄을 던지며 파랑·분홍·주황·노랑 등의 색깔을 뒤집어쓰면서 즐길 수 있다면 이 대회의 취지를 온몸으로 이해한 것이다. 참가자들은 처음엔 깨끗한 하얀 옷을 입고 출발해 일정 지점을 통과할 때마다 염색 가루, 물감이 든 물총 등을 맞고 알록달록한 색으로 물들어 결승점에 도달하게 된다. 서로에게 색가루를 던지는 모습은 스페인의 토마토축제와도 비슷한데, 사람들의 머리와 옷 전체가 여러 가지 색으로 물든다는 점이 이 대회의 포인트다. (그래서 이 대회 참가를 위해서는 다양한 색을 잘 표현해줄 수 있는 흰색 티셔츠와 눈 보호를 위한 선글라스가 필수다.) 
 

뛰기? 튀기!
 
  해외에서는 이미 유명한 마라톤이었기에 인천에서 경기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참가 신청을 했다. 방학의 마무리와 개강 준비로 정신이 없으면서도 마라톤을 생각하면 어린아이마냥 입가에 미소가 날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었다. 경기 일주일 전, 주최 측에서 집으로 날아온 티셔츠는 행여나 망가질까 ‘고이 모셔놓은 뒤’ 입었다. 하지만 경기장에 도착해 주위를 둘러본 순간 후회가 밀려왔다. 티셔츠의 배꼽 부분을 휑하니 자르거나 갈기갈기 찢은 것은 눈에 띄는 축에도 속하지 않았다. 발레할 때 입는 튀튀를 걸치거나, 펑크 스타일의 무지개색 가발을 쓴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가위질 한 번 하지 않은 순결한 나의 티셔츠는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아홉수라 그래요. 이해하세요’라는 재미난 글귀를 등에 박은 7명의 여자 무리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29살이 된 친구들끼리 마지막 20대의 추억을 만들기 위해 티셔츠를 같이 리폼했다”는 얘기를 들으니 문득 마라톤이라기보다는 퍼레이드가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라톤은 15분 간격으로 총 4번 출발하는데, 나는 제일 첫 타임인 9시 15분에 출발선 앞에 섰다. 다른 마라톤대회처럼 몸을 풀거나 심호흡을 다지는 모습은 전혀 볼 수 없었다. 하지 말라면 꼭 하는 청개구리 마냥, 출발도 전에 색가루를 뿌려대는 사람들이 있다면 있었지 말이다. 마라톤이 시작하면 일정한 지점마다 색깔 폭탄을 투하하는 주황색,  분홍색, 파란색의 컬러 스테이션이 이어진다. 300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참가자들에게 색가루를 던지는데, 뿌려주는 색이 성에 차지 않아 아예 색가루 위에서 뒹구는 참가자들도 있었다. 외국인도 많았지만 원래의 머리가 무슨 색깔이든 간에 출발선에서부터 쉴 새 없이 뿌려지는 색가루 탓에 참가자들의 머리는 분홍색, 파란색으로 물들어 갔다. 색깔이 덧입혀질수록, 티셔츠가 더러워질수록 사람들의 모습은 ‘자유분방’ 그 자체였다. 
 

더 많은 색을, 더 많은 퍼포먼스를!
 
  달리는 대신 춤추고 걸으면서 다음 색깔을 고대한다. 참가자들 대부분은 방수 가방에 카메라를 넣어 와서 자신이 망가지는 모습을 쉴 새 없이 찍어댄다. 아는 사람이 아니어도 색을 뒤집어쓰기만 하면 바로 친구가 된다. 서로를 보며 웃고,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다정하게, 그리고 몇년지기 친구만 할 수 있을 법한 엽기적인 자세로 사진을 찍는다. 잔디밭이 나오면 잔디에 눕거나 옆에 있는 매점에서 컵라면과 김밥을 사와 먹다가 다시 뛰는 자유로운 모습, 마치 어린이들이 놀고 있는 놀이터에 있는 듯했다. 색가루로 뒤범벅 된 서로를 보며 깔깔 웃는 사람들. 색을 더 진하게 물들이겠다며 티셔츠에 물을 뿌리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출발선에서 봤던 어른(?)들과는 사뭇 다른 사람들인 것만 같다. 그들의 웃음은 유치원에서 물감 장난을 하고 있는 어린아이들마냥 순도 100%의 웃음이었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이렇게 색폭탄을 던지면서 놀거나 바닥에 뒹굴면서 노는 일이 없는데, 모두들 이 마라톤을 통해 잠시나마 나이를 잊고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는 듯했다.
  결승점에는 완주한 사람들의 뒤풀이, ‘애프터 파티’가 기다리고 있다. 애초에 기록이 목적이 아니었던 만큼, 결승선 통과는 이들에게 별 의미가 없다. 굳이 꼽자면, 결승선에서 나눠주는 시원한 음료수와 몸을 닦을 물티슈를 받은 기쁨정도? 사람들은 결승선보다는 이 애프터 파티를 더 기다린 것 같아 보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색으로 물들였던 경주를 완주한 사람들, 아직까지 흥겨움이 남아있는 이들을 위해 파티에서는 한 줌이 아니라 대형 호스로 색가루를 뿌려댄다. 신나는 음악과 춤이 함께하는 뒤풀이가 끝나자 근처 거리로 알록달록한 좀비같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주변에 샤워시설이 있었지만, 색가루를 씻어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마치 깨끗한 옷을 입기 싫어하는 사람들처럼!

색을 더하다, 즐거움을 더하다

“하나의 색깔로만 칠해진 그림은 어디에도 없다. 수많은 색채들이 어울려서 하나의 명작을 만들어낸다"
-헤르만 헤세
 
  흔히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한다. 긴 거리를 끊임없이 달려야 하는, 지루하고 외로운 자신과의 싸움이 인생과 비슷하기 때문이란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앞서나가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다. 앞으로만 뛰어야 한다는 사실이 참 단조롭고 지겨울 때, 우리는 인생의 다채로운, 마치 한편의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복잡한 인생 얘기는 잠시 제쳐두더라도 ‘마라톤=지루한 일’이라는 사실에만 주목해보자. 이렇듯 지루함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마라톤에 간단히 몇 가지 색을 더했더니 그 순간 마라톤은 신나는 파티로 변했다. 무채색 도안에 색연필을 칠해 나만의 특별한 그림을 만들어내듯, 단조롭고 무료했던 일상에 색을 입히니 우리는 한껏 즐거워진 것이다. 사람들의 행복과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컬러미라드의 취지는 바로 여기서 드러나는 듯하다. 색깔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화장과 머리, 옷이 어떤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저 즐거워만 하면 될 뿐!
 
   흰색의 티셔츠를 입고 온 4만 명의 사람들은 처음엔 그저 똑같은 도화지에 불과했다. 그러나 마라톤이 끝나고 여러 가지 색으로 뒤범벅이 된 그들은 어느새 한 장의 아름다운 그림이 되어있었다. 
*'Rad'는 미국 속어로 '기막힌'이라는 뜻의 형용사이다. 
 
글·사진 오도영 기자 
doyoungs92@yonsei.ac.kr
자료사진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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