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urn! 당진으로 이동!

 막막함. ‘여행 with 주사위’를 보고 가장 먼저 든 기분이었다. 그야말로 주사위가 정해주는 대로 돌아다니는 것이 그것이 이번 여행의 방식이었다. 이런 아이디어를 낸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만큼 막막하기도 했지만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설렘도 동시에 안고 무작정 동서울 터미널로 향했다. 수많은 도착지 목록 앞에서 필자는 담당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여행 안가면 안될까요’ 라는 부탁을 겨우 삼킨 채 입을 열었다.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 중 각각 두 개씩만 뽑아주세요” 부장의 ‘feel’대로 6가지의 목록이 정해졌고 주사위는 4번, 당진을 선택했다.

주사위 4. 충청남도 당진으로!
 
당진. 배차표를 살피니 가장 이른 버스도 3시간 후였다. 졸지에 생긴 3공강. 깨알 같은 배차간격의 버스가 있는 강릉이 나올 때까지 주사위를 다시 던지고 싶었지만 겨우 참았다. 세 시간 후 당진으로 가는 길, 필자는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을 하고 싶었으나……아아 잠들어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버스는 당진 터미널에 도착했다. 기자는 우선 관광 안내 책자를 펼쳐 사계절의 감동이 흐른다는 당진 9경의 목록을 훑었다. (비록 사계절의 감동은 마지막까지 9경도 못했지만…….) 숫자가 6까지 있는 주사위 덕에 가보기 힘들 곳들을 우선 배제한 후 주사위를 두 번째로 던졌다. 결과는 3번, ‘솔뫼성지’였다. 
터미널에서 주사위를 던지고 있는 모습이 신기했는지 아저씨 한 분이 찾아오셨다. 아저씨께선 주사위 하나로 당진까지 오게 된 기자의 이야기를 듣고는 “뭐 그런 여행이 다 있어? 설레긴 하겠네”라며 웃
음을 터뜨렸다. (남의 일이라고 좀 크게 웃으신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아저씨는 주사위 여행 다니는 아들 뻘의 기자가 귀여우셨는지 음료수 하나를 쥐어주셨다.
 
주사위 3. 역사와 자연의 합작, 솔뫼성지
 
아저씨와의 짧은 대화를 끝내고 다음 여정지인 솔뫼성지로 향했다. 솔뫼성지는 지방문화재 제146호 기념물인 동시에 한국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표지판 하나만 믿고 끝없는 논길을 지나 어렵게 솔뫼성지를 찾았다. 겨우 도착한 기자를 맞이해 주신 수녀께 이 지역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솔뫼는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4대의 순교자가 살던 곳으로 ‘한국의 베들레헴’이라고 불린다. 이런 명성에 걸맞게 솔뫼성지에는 김대건 신부 생가, 기념관 등 다양한 건축물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다시 발걸음할 일이 있다면 그건 이곳의 역사나 건축물보다는 이곳의 눈부신 자연 덕분일 것이다. 솔뫼는 ‘소나무가 우거진 언덕’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솔뫼성지는 그 이름에 걸맞게 수많은 나무와 옛 모습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는 한옥 그리고 탁 트인 풍경을 뽐내고 있었다. 
 
주사위5. 깔끔했던 소머리국밥
 
솔뫼성지를 둘러보고 난 뒤 허기가 지자 기자는 망설임 없이 주사위를 던졌다. 나온 숫자는 5. 가는 길에 다섯 번째로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기로 했다. 근데 시골이다 보니 식당이 몇 개 없다. 식당 하나하나 지나가는 것이 너무 안타까울 정도였다. 숫자 6이 나오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한참을 그렇게 걷는데 혼자 먹기 정말 부끄러운 고깃집을 뒤로하고 5번째로 보인 곳은 소머리국밥 집이였다. 반찬은 많지 않았지만 깔끔한 한 상의 식사가 등장했다.
 
주사위1. 앞으로 도비도, 뒤로 도비도를 만나다.
 
생각보다 맛있었던 6천 원짜리 국밥을 먹고 난 후 다른 여행지를 가기 위해 주사위를 던졌다. 1번. ‘도비도’였다. 이름도 특이한 도비도는 정확히 현재 위치와 반대에 위치해 있었다. 짧은 한숨과 함께 경치나 구경하자는 마음으로 다시 버스에 올랐다. 그 버스의 종점인 도비도에 도착하니 이미 날은 저물어 있었다. 그리고 버스 기사님의 마지막 한 마디, “학생! 이게 막차인 건 알지?”
괜히 주사위가 원망스러웠지만 또 한 번 참을 인을 새기며 도비도를 둘러봤다. 근데 여기 생각보다 운치 있다. 선착장인데도 사람들은 텐트를 치고 낚시를 하고 있었다. 일단 주변 마트에 가서 낚시대와 폭죽을 구입한 후 선착장 주변에 주저앉았다. 4천 원짜리 낚시대에 걸릴 물고기가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미끼를 걸고 낚시대를 던졌다. 
바닷바람은 뺨을 스치고 지나갔고 주변은 고요했다. 처음에는 주변의 정적을 견디다 못해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묵묵부답인 낚시대 앞에서 평소에는 미처 하지 못했던 생각에 잠기는 것도 꽤 괜찮았다. 힘든 춘추 생활 생각, 얼마 전 들어간 송도학사 생각, 요즘은 얼굴보기도 힘든 가족 생각, 어릴 적 좋아했던 여자아이 생각까지. 한동안 생각하고 나니 마음은 고요해졌다. 때마침 바람 때문에 거칠던 바다도 잠잠해졌다. 역시 물고기는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다.
점점 밤은 깊어갔고 주변에 잘 곳을 찾아보았다. 청소년 수련회 올 법한 장소가 하나 있었다. 근데 하룻밤에 4만 5천 원. 가격을 듣고 잠시 망설이다 결국 다시 낚시를 하러 갔다. 또 다시 생각에 잠기는 것도 잠시, 내가 고기를 잡는 것인지 나를 잡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잠이 몰려왔다. 결국 비장의 무기인 폭죽을 터뜨렸다. 아름답다. 졸려서 그런지 빛이 퍼져보였다. ‘마약을 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라는 의문과 동시에 다시 잠에 빠졌다. 얼핏 잠에 든 것도 잠시, 추운 날씨 때문에 결국 새벽 5시에 해양경찰서로 가서 여차저차 사정을 말씀드렸다. 경찰 아저씨가 내 말을 듣더니 웃으시며 있으라고 했다. 경찰서를 처음 가본 듯하다. 그것도 내 발로. 잠을 자기 위해서.
 
주사위3. 여행이 힘들어도 악으로! 아그로랜드에 가다
 
첫 버스를 타고 당진터미널로 돌아왔다. 너무 구경만 했으니 직접 무언가 해 볼 타이밍! 당진의 체험프로그램들로 보기를 짜고 주사위를 던졌다. 3번, 낙농체험목장 ‘아그로랜드’였다. 지난 2004년부터 국내최초 낙농체험목장으로 운영된 이곳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있었다. 기자는 그 중 소들에게 건초주기, 우유주기, 소 젖 짜보기, 새 모이주기, 낙타타기, 트랙터 열차타기를 해봤다. (사실 우유주기가 끝나고 기삿거리는 충분했지만 재밌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소들의 먹성에 감
탄했던 건초주기와 우유주기, 기자의 손 위 모이뿐 아니라 손까지 파먹는 새 모이주기 등 난생 처음 해 보는 재밌는 체험들이 많았다. 
다음 눈길을 돌린 곳은 낙타체험. 낙타를 탈 때는 마치 내가 유목민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실제 드라마 속 유목민족이 그렇듯 건들건들 낙타를 탔다. 낙타는 말보다 안정감이 낮다고 한다. 낙타를 타고 있으면 몸이 좌우로 흔들리기 때문에 안장의 손잡이를 꽉 잡아야한다. 하지만 이런 흔들림조차 하나의 재미였다. 낙타를 타면 저 높은 ‘위 공기’를 마실 수 있다. ‘이게 우월한 키의 소유자들이 마시는 공기인가?’라는 생각에 부러울 따름이었다. 트랙터 열차를 타고 이곳 농장을 구경하며 여행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눈앞에 펼쳐진 목장은 넓고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 밖의 풍경은 논밭에서 점점 빌딩으로 바뀌어 갔다. 주사위 여행은 내 생에 최고로 비효율적이고 수동적인 여행이었다. 하지만 내 생에 가장 설레고 또 혼자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었던 여행이기도 했다. 선택권을 주사위에게 내어준 대신 다음 목적지에 대한 기대를 얻었다. 예상치 못한 해프닝이, 다신 해보지 못할 경험이 색다른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을 하며 주사위를 원망할 때도 있었지만 여행이 끝나니 나 대신 여행을 위해 모든 계획을 세워준 주사위가 살짝은 고마워졌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 때, 그냥 나에게만 모든 생각을 집중하고 싶을 때. 모든 고민은 주사위에게 맡겨 놓고 떠나보는 건 어떨까?
박진형기자 
pjh928@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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