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작가는 팔아먹을 상처가 있어야 한다잖아. 영혼을 후벼 파는 그런 상처.

잡지사 편집장에게 보낼만한 소설을 찾기 위해 책상 앞에 서서 습작 노트 몇 권을 들춰보던 쇼팔로비치는 갑자기 빛바랜 엠의 목소리가 떠올라 그대로 동작을 멈추었다. 엠에 대한 기억은 쇼팔로비치의 머릿속 한 쪽 귀퉁이에서 위태로운 모습으로 웅크린 채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 끝나 버린 인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이별도 하나의 진부한 일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을 때, 쇼팔로비치는 이렇게 다짐했다.

쇼팔로비치가 엠과 나누었던 모든 순간을 아무렇게나 구겨서 다시는 손이 닿지 않을 곳에 봉인시켜버린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봉인된 기억은 지금 이 순간, 쇼팔로비치의 간절한 의지를 가볍게 무시하며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의자에 무너지듯 주저앉은 쇼팔로비치는 가슴을 한 번 쓸어내렸다. 쩍쩍 금이 간 기억의 끝에서 엠의 모습이 환영처럼 서서히 피어올랐다. 환영처럼 피어오른 엠의 모습이 펼쳐 놓은 노트 위로 얼룩덜룩 어른거렸다. 노트에 또박또박 적어놓은 건 「무너진 내 손을 잡아줘」라는 제목의 엽편소설이었다.

그 소설은 쇼팔로비치가 예술 대학에 들어가 처음으로 합평을 받은 습작품이었다. 쇼팔로비치에겐 공격적인 합평의 내용보다 엠과 함께 공유했던 나른한 저녁이 더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첫 합평회가 끝나고 뒤풀이를 하던 시간에, 엠과 쇼팔로비치는 술자리가 아닌 근린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벤치에 나란히 앉아 사이다를 마시며 두 사람은 스트린드베리와 류보미르 시모비치의 작품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엠과 쇼팔로비치 모두 소설가 지망생이었지만 연극적인 요소가 주는 비논리적인 설렘과의 은밀한 외도를 즐길 줄 알았다. 불쾌할 정도로 연약하고, 안정된 삶에서 엇나가버린 두 사람의 감성은 분명 연극의 정서와 맞닿아 있었다.

술이 깬 다음 날이면 쉽게 증발해버릴, 거짓으로 질척대는 웃음과 잡담에서 두 사람이 서글픔을 느낀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술자리를 통해 친밀도를 높여가는 문화에 익숙해지지 못하면서 파생된 황홀한 소외감은 두 사람의 가슴에 깊고 짙푸른 그림자를 조금씩, 조금씩 길게 드리워주었다. 쇼팔로비치에게 남겨진 그림자는 곪아 터진 상처로 진화하여 창작의 원동력이 되어 갔던 반면 엠은 자신이 느낀 소외감을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상처로 인지하지 않았다. 쇼팔로비치가 대학 사학년 때 소설가로 등단하는 모습을 보며 엠은 팔아먹을 상처가 고갈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지독히도 쓸쓸한 축하의 말을 건넸다. 더불어 자기에겐 영혼을 후벼 파는 상처가 없으므로 작가의 꿈을 깔끔하게 접었다고 선언했다. 엠의 목소리엔 쨍그랑, 견고하게 쌓아왔던 꿈이 산산조각 나서 써그럭, 써그럭 잘게 부서져가는 파열음이 배어 있었다.

- 팔아먹을 상처가 있다는 건 형벌이고 저주야.

쇼팔로비치는 혼잣말을 중얼거린 후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몇 번 긁고 나서 노트를 탁, 덮었다. 쇼팔로비치에게 있어서 상처란 입구와 출구가 보이지 않는 검은 침묵이었다. 검은 침묵에게 먹혀버린 채 살아왔던 쇼팔로비치는 현재가 아닌,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불안정한 추였다.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소설 속에서 지나버린 과거를 뒤흔들고 다가올 미래를 그리워하며 현재를 지우는 행위를 구체화했다. 현재를 자신의 등 뒤에 저만치 세워놓고 과거로 낡아갈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렸다. 이런 외로운 삶을 내가 원했던 것인가. 쇼팔로비치는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눈을 감았다. 등단 후 꾸준히 소설을 발표해왔으나 요즘 들어서 뒤늦은 슬럼프가 찾아왔는지 아무 것도 쓸 수 없었다. 자신을 작가로 만들어준 예민한 감각과 우울한 상처들이 이제는 잔인한 덫으로 변해 점점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아 원고 청탁을 해온 잡지사엔 오래전에 습작품으로 남겨둔 해묵은 소설을 적당히 퇴고하여 줄 생각이었다. 느닷없이 엠의 목소리가 떠오르기 전까지 말이다.

- 잘 지내니?

쇼팔로비치는 답장을 기대하지 않은 채로 엠에게 안부 문자를 보냈다.

김 헌 (국문·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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