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에서 최인호 소설 '바보들의 행진'을 다시 쓰다

그러니까 하느님. 저는 바보에 멍텅구리올습니다. 하느님. 1973년에 저는 우울하였사옵니다. 저는 대학생이었지만 조금도 대학생 대우를 받지 못하였사옵나이다… - 소설 『바보들의 행진』 중

 

우리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한 최인호 작가의 『바보들의 행진』은 주인공 병태와 영자가 겪는 에피소드를 묶은 연작소설*로 1970년대 대학생들의 시대정신과 자유분방한 모습이 진솔하게 담겨있다. 당시 대학생들의 주된 관심사는 오늘날 대학생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암울했던 당시의 시대상황 때문에, 70년대 대학생들은 일거수일투족 기성세대의 통제와 억압에 시달려야 했다. 신촌의 대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Y대 철학과 3학년 병태가 바리깡 든 경찰의 장발 단속을 피해 숨바꼭질을 하던 곳도 바로 신촌 거리였다.

 

바리깡과 30cm자


우리대학교 정문을 지나 백양로를 걷다보니 병태가 머리칼을 지키기 위해 경찰관과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이 상상된다. 병태의 탐스러운 머리칼이 ‘순경 나으리’의 손에 들린 바리깡에 깎이기 일보직전인 그 모습. 70년대 남학생들 사이에선 귀와 이마를 따라 내려와 옷깃까지 덮는 장발이 유행했고, 여학생들은 너도나도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녔다. 지금은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입는다고 해서 쫓아올 순경 나으리는 찾아볼 수 없지만, 작은 몸짓으로나마 자신의 자유와 개성을 추구하려고 했던 1970년대의 젊은이들은 신촌 어디에서도 당당히 서 있을 수 없었다.


어느 틈에 나타났는지 순경 나으리가 골목에서 ‘황야의 무법자’처럼 나타나 다짜고짜 병태의 어깨를 잡았다…(중략)…병태는 파출소에 끌려가서 머리를 깎였다. 순경 나으리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병태의 탐스러운 머리칼, 아, 삼손의 머리처럼 뿌리 깊은 머리칼, 윤기 흐르는 머리칼을 밀었다…


대동제가 한창이던 지난 14일 밤, 학생들은 자신의 젊음과 자유를 자랑이라도 하듯 만끽했다. 백양로의 뜨거운 분위기 속에 단속이 아닌 순찰을 돌고 있는 경찰관의 야광 조끼에 축제의 불빛이 부딪혀 나온다. 하지만 그의 손에 병태가 두려워했던 바리깡은 더 이상 들려있지 않았다.

 

교수님 E학점만 주세요. 제발


대학 졸업장이 곧 취업을 보장했던 시기에 학점은 장발보다 덜 중요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당시 대학생들도 F학점을 받는 것은 눈앞이 캄캄했나 보다.


어쨌든 결론부터 말하면 영자는 시험지를 덮고 나올 때 눈앞에 F학점이 오락가락하였다는 것이다. 영자는 교수님 집을 알아 가지고 예쁘게 예쁘게 연지곤지 찍고 귤 한 상자를 사 들고 멀고먼 학점의 길로 나선 것이었다.


불문학 특강 기말 시험을 망칠대로 망친 영자에게 F학점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시험은 못 봤어도 성적은 받아야겠다는 영자는 향수냄새를 풍기며 담당교수를 찾아갔다. 그러곤 F학점만은 면하게 해 달라며 생떼를 쓴다. 영자의 이런 행동은 자신의 성적 평균이 떨어지는 것이 두려워서도, 낮은 학점 때문에 일자리를 찾지 못하게 될 것이 걱정돼서도 아니었다. 단지 F학점 끝에는 귀찮은 재수강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67학번 고우성 동문은 “당시에는 대학 진학률이 높지 않아 좋은 학점보다는 대학졸업장 자체가 취업을 보장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바로 얼마 전, 2013년도 대동제 기간 3일 동안 중앙도서관 옆 간이 무대에서는 춤과 음악 동아리의 공연이 이어졌다. 창을 넘어 전해지는 리듬에 가슴이 뛸 법도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도서관 24시간 열람실에는 학업에 매진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솟구치는 흥을 억누르고 책상 앞에 앉았지만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어깨춤을 추는 학생들의 모습도 간간이 보인다. 축제 기간에 무엇이 그들을 도서관에 앉혀 놓은 것일까.
2013년의 병태와 영자들의 어깨 한 쪽 위에는 스펙에 대한 부담이, 다른 한쪽에는 학점에 대한 걱정이 한없이 쌓여 있다. 애매한 B학점으로 학점평균을 떨어뜨리기보다 재수강을 할 수 있는 F학점이 낫다는 학생도 있다. 취업난으로 졸업을 미루는 학생들도 많아지면서 좋은 성적을 받아도 일부러 F학점을 받기 위해 교수실 문을 두드리는 학생도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오늘날 대학생들에게 어쩌면 학점과 스펙에서 자유로웠던 1970년대는 부러운 시기일 수도 있겠다.

 

스킨십과 애정의 정도는 정비례하지 않는다


문득 병태는 영자와 뽀뽀하는 꿈은 꿈이었다 하더라도 분명 이것은 길조가 아니고 무엇이냐…(중략)…순간 병태의 손이 영자의 머리칼을 쥐었다. 입술이 날쌔게 무단 침입하였다. 그러나 그 순간 영자는 병태의 아랫도리를 강타하였다…


중앙도서관에서 백양로 삼거리까지. 백양로 온 거리에는 학과 주점, 동아리 부스 등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축제 분위기에 흠뻑 취한 학생들의 왁자지껄한 소리에서 벗어나려 걷고 걷다보니 고요한 신촌캠의 언덕 청송대에 다다랐다. 조용하고 은밀한 청송대는 병태가 준비해왔던 키스작전의 더할 나위 없는 무대였다. 하지만 병태는 시대를 앞서가도 너무 앞서갔던 것 같다. 입술을 들이민 병태는 영자에게 금지된 급소를 걷어차이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한국외대 74학번 조성기(59)씨는 당시 남녀 대학생의 관계에 대해 “사랑을 나누는 이성적인 관계보다 시국을 함께 토론하는 ‘동지적 관계’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당시를 “간염에 걸린 여학생을 사귀는 남학생이 간염에 걸리면 둘 사이의 신체적 접촉이 있었다는 것인데 이런 사건이 굉장히 친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특이한 일이었다”고 회상하며 웃었다.
오늘날 대학생들의 개방적인 연애에서는 병태가 가슴 떨려하며 준비했던 키스작전과 같은 어수룩함을 찾아볼 수 없다. 개교 이래 지금까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청송대 소나무. 그 사이에서 커플들은 벤치를 하나씩 차지하고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오늘날 대학생 커플들은 주위에 누가 있든지, 어두울 때나 밝을 때나,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당당하게 애정행각을 벌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연애에 대해 개방적으로 변한 오늘날, 많은 대학생들은 애정결핍을 호소하고 있다. 이전에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요즘의 연애는 개방적이고 자유롭지만, 오히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얕고 잦은 관계가 대학생들을 외로움 속에 가둬버리는 것이 아닐까.

 

슬프면 눈물이 답답하면 구역질이


병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비실비실 강의실을 빠져나와 복도로 나왔다. ‘진리와 자유’. 개똥 같은 소리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본관 천장에 붙어 있었다…


데모만 했다 하면 곧 휴교령이 떨어졌고 수업은 모두 중지됐던 1970년대의 대학교. 고 동문은 “잦은 휴교로 인해 한 학기에 반은 수업을 들을 수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휴교령이 내려진 학교를 나서는 병태는, 시대가 품지 못했던 ‘진리와 자유’의 가치를 잠시 품었지만 곧이어 임자 없는 아기를 뱃속에 안고 있는 임산부처럼 헛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1970년대 대학생들 대부분은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시국에 대한 고민과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갈구했고, 그들의 대화와 토론의 주제도 이러한 사회적인 고민이 주를 이뤘다.
오늘의 신촌 밤거리에는 데모의 아우성 대신 학생들의 활기가 넘친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그 시절 병태가 겪은 성장통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신촌거리에서 만난 김동규(정경경제ㆍ08)씨는 “친구를 만나면 나이는 계속 먹는데 해놓은 것은 없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푸념을 하기 바쁘다”며 고민을 털어놓았다. “삶의 태도와 가치관에 대한 고민이 많다”는 문다은(철학ㆍ11)씨의 말을 들으면 오늘날의 청춘들도 ‘진리와 자유’에 대한 나름대로의 고민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바보들의 행진


어느 날 아침, 영자는 신문에서 앤 공주와 필립스 대위가 멋지게 포옹을 하고 있는 사진을 보았다. “좋겠다 좋겠어, 앤 고 계집앤 정말 좋겠다. 아아, 그런데 나는 뭐니. 나는 뭐야. 학점도 제대로 못따고”.…


병태의 뽀뽀를 거절한 영자는 그래도 결혼은 하고 싶단다. 앤 공주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행복한 모습을 보자 병태가 뽀뽀에 안달이 난 것만큼 영자는 결혼에 안달이 났다. 1970년대만 해도 연애결혼을 하는 커플이 많지 않았다. 영자도 병태와 결혼을 생각하며 만난 것은 아니었다. 힘든 대학생활을 함께 견디는 동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학점과 결혼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에 영자는 잠시 ‘취집’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영화로도 제작된 『바보들의 행진』.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군에 입대하는 병태와 영자의 입영열차 차창 틈으로의 키스신이다. 소설에서는 실패했던 병태의 키스작전이 영화에서는 성공했다. 하지만 병태가 장발단속을 피해 두문불출한 5일도 참지 못했고 결혼에 안달이 났었던 영자는 과연 3년의 기나긴 군 생활을 기다려 주었을까.
2013년 오늘도 서울역에서는 어김없이 시간 맞춰 플랫폼에 열차가 들어왔다. 입영열차가 사라지면서 플랫폼에서 군대 가는 병태들을 배웅하는 영자들은 이제 없지만 기차역에서의 아쉬운 이별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계속 되고 있다. 병태가 탄 입영열차가 야속하게 떠난 것처럼 가야만 하는 기차는 정해진 시간에 또 야속하게 떠났다.


오늘날 대학생들은 병태와 영자의 대학 시절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자유로운 대학 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하지만 더욱 높아진 취업 문턱 앞에서, 옆의 친구가 라이벌이 되는 극한의 경쟁구도 속에서 진짜 ‘내 사람’을 찾지 못해 가슴 아파하기도 한다. 1970년대 병태와 영자들에게는 좌절스러운 상황이 있었지만, 이를 이겨낼 수 있게 해 줄 꿈이 있었고 억압의 시대를 타개하고자 한 열망이 있었다. 경찰관에게 바리깡으로 머리가 깎여도, F학점이 나와도, 휴교령에 학교가 문을 닫아도, 그 안에서 살아갈 궁리를 했던 바보들. 억압의 시대 속에서도 독특한 낭만이 있었던 지난날 대학생활을 회상하는 바보들은 이제 어른이 됐다. 병태와 영자가 오늘날 대학생들에게 말한다. ‘바보들의 행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 연작소설: 한 작가가 같은 주인공의 단편 소설을 여러 편 써서 하나로 만든 소설.
 

 

손성배 기자 89sungbae@
사진 남채경 기자 skacorud2478@
사진 장미 기자 mmmi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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