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의 소수 언론사들이 국제적인 정보의 유통망을 과점 지배하던 시절의 화두는 ‘관점’이었다. 문화적 전통을 미개나 야만으로 규정한 서방 미디어의 편견으로 인해 제3세계 나라들에서 일어나는 실상들이 왜곡돼 유통된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자기네 글과 말을 갖고 있지 못한 종족은 물론 수천 년 독자적인 언어를 구사해 온 나라들까지 편향된 정보의 희생양으로 간주되었다. 서방 미디어의 ‘관점’으로 생산된 정보들이 일방적으로 확산되었다. 제3세계 스스로 자기 문화를 깔보고 홀대하는 양상들이 빚어졌다. 글을 영혼의 외출이라 하고 말을 일컬어 존재의 확인기제라 한다. 바야흐로 자기의 말과 글을 갖고 자기의 관점으로 뉴스를 만들어 공유해 보려는 대응책들이 나타났다. 이른바 반 세기 전 벌어진 국제정보질서유통 논쟁이다. 정보질서 논쟁은 작은 나라들로 하여금 자기의 관점으로 뉴스를 생산하고 공유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자각하게 만들었다. 물론 한 나라 안에서도 ‘누구의 관점’으로 뉴스를 생산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핵심적인 질문이다.
뉴스는 ‘관점’이 핵심이다. 관점이 없는 정보는, 혹은 관점이 없다고 여겨지는 정보는 대개 수용자의 정신을 흐리거나 수용자들로 하여금 특정 제품․서비스를 구매케 하는 유인책으로 활용되기 쉽다. 관점이 너무 뚜렷한 뉴스 정보들도 많다. 지배 권력이 여론을 호도하려고 생산한 뉴스나 지배 권력과 조응한 언론 권력이 지배 복무라는 의도를 가지고 관점화한 뉴스들이 그러하다. 그러한 뉴스는 관점이 없는 정보와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의 건전한 정보유통과 민주주의의 초석이라고 말하는 여론형성에 오히려 장애가 된다. 불량한 정보를 걸러내는 장치의 하나로 ‘다양한 미디어’가 필요한 까닭이기도 하다. 다양성을 위해서는 미디어의 수가 많아야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양한 관점에서 뉴스가 생산돼야 한다는 점이다.
대학 언론의 존재의의도 거기에 있다고 본다. 현재 대학운영을 견제하고 비판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관이 대학신문이다. 우선 구성원의 하나인 ‘대학생’의 관점에서 대학의 문제를 바라보고 비판하고 혹은 성원하는 존재가 대학신문이다. 대학 행정이 대학생과 대학생 부모의 일방적 희생을 전제로 질주하는 것을 막아낼 수 있는 뉴스의 생산은 대학신문에 기대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대학 경영이 전체 구성원의 이익과 가치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헛된 치부에 몰입하는 것을 경계하고 차단하는 역할도 대학신문이 해주어야 한다. 나라 안팎의 변화가 해당 대학 구성원들에게 미칠 영향을 평가하고 대응의 방향을 인도하는 소임도 대개 대학신문이 수행해 왔다. 이처럼 대학신문은 대학의 정보를 내외적으로 올바르게 공유하는 통로로 활용되고 내부적으로는 대학의 운영 시스템을 감시․견제하고 이상 징후를 조기에 경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대개 대학 집행부는 대학신문 등을 관점 없는 ‘홍보 매체화’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고 현재 우리나라의 많은 대학신문이 그런 모습으로 변질되었다. 대학신문이 형해화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대학신문이 관점을 잃어버릴 때, 몸무게를 줄이기 위해 심장을 도려내는 우매한 마라토너의 비극이 시작된다. 관점을 가진 대학신문의 존재는 그 대학의 좋은 미래를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하다. 지금, 연세춘추가 딱 그러한 도정에 놓여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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