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3일 헌법재판소(아래 헌재)가 ‘인터넷 본인확인제’(실명제)가 위헌이라고 결정한 순간 여러 사람이 생각났다. 2007년 차별금지법 논란 당시 게시판에 의견을 달면 자신의 이름, 나아가 성정체성이나 국적이 알려질까봐 망설이던 소수자들. 입시정책을 비판하는 게시판을 운영하면 만19세 미만의 선거운동을 금지한 선거법 아래 청소년 글쓴이들의 나이가 밝혀질까봐 고민하던 청소년 인권 활동가들.


주민번호가 확인된 국민에게만 글 쓸 권한을 주겠다는 정부의 발상이 2003년 처음 발표됐을 때, 너무 어이가 없어 해프닝으로 그칠 줄 알았다. 그러나 이른바 ‘개똥녀’ 사건과 같은 사건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인터넷 탓’이 늘어갔고, 결국 이 어이 없는 정책이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 실현되는 결과를 낳았다.

헌재의 이번 결정에서 가장 주목할 대목은 ‘익명 표현의 자유’가 국민의 기본권이라는 선언이다.  현대 대중사회는 이미 오프라인부터가 익명 사회이다. 익명은 때로 ‘묻지마 살인’도 불러 오지만 길거리의 모든 이들의 이름표를 달게 하지 않는 것이 근대 인권의 정신인 것처럼 인터넷이라는 미디어가 어떤 문제적 사회 현상을 나타낸다고 인증을 강제하는 것은 국가의 폭력이다.

헌재는 인터넷 익명 표현에 대해 “현실 공간에서의 경제력이나 권력에 의한 위계구조를 극복해 자유로운 여론을 형성하면서 다양한 계층의 국민 의사를 반영해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다”고 봤다. 더불어 “비록 인터넷 공간에서의 익명표현이 부작용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갖는 헌법적 가치에 비추어 강하게 보호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사실 헌재는 그간 공직선거법상 인터넷 실명제에 대한 헌법소송을 계속 물리쳤다. 하지만 최근 실명제 사이트에서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발생한 이유로 개인정보수집과 사용을 강제하는 실명제에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면서 결국 문제의 심각성을 인정했다.

더구나 실명제를 실시하고 몇 년이 흘러도 이 제도는 전혀 제 역할을 못했다. 실명제 실시 이후에도 타블로 명예훼손 사건과 같이 명예훼손, 모욕, 비방 정보가 전혀 줄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도 인터넷 실명제가 질긴 목숨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경찰과 국가정보원이 이 제도의 폐지를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인터넷으로 촛불시위가 크게 조직된 이후 경찰은 영장 없이 네티즌들의 이름과 주민번호를 알아내는 편리함에 푹 빠졌다. 헌재도 “본인확인제는 … 모든 게시판 이용자의 본인확인정보를 수집해 장기간 보관하면서 개인정보가 유출될 위험에 놓이게 하고 다른 목적에 활용될 수 있도록 하며, 수사편의 등에 치우쳐 모든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한다고 지적했다.

헌재의 결정 이후 몇몇 언론은 악플이 넘쳐날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러나 인터넷은 실명제 하에서도 늘 논란의 미디어였다. 학생들의 자살이 계속될 때, 자살 사이트를 탓하는 것은 쉽다. 어떤 사회문제가 있을 때 미디어는 쉽고 저렴한 표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실명/익명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인터넷은 우리 사회와 꼭 같을 뿐이다. 악플이 늘어나는 현상의 이면에는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만연한 토론 부족과 인권 경시적인 문화가 있다.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현상보다 본질, 그리고 싸우는 이들에 있다. 모두가 인터넷이 문제라고 말할 때, 인터넷과 인권의 가치를 믿어 왔던 시민들이 있었다. 이들의 싸움으로 얻어낸 익명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즐기자. 그래서 드러나는 인터넷의 문제가 있다면 또한 이들의 지혜와 힘으로 함께 풀어갈 수 있을 것이다.

*외부 필자의 의도는 우리신문사의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장여경(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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