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서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배우의 몸짓, 또렷한 목소리는 3D영화가 결코 따라잡지 못할 생동감을 안겨준다. 거기에 작품의 주제의식과 배우들의 연기, 음악과 조명 등 각종 무대장치들이 모여 작품의 감동은 배가 된다. ‘소통과 희망’을 모토로 한 서울연극제의 41편의 연극 중 △공식참가작 △미래야 솟아라 △기획·초청작 부문에서 각각 1편씩을 골라 순서대로 소개한다.

 

『인형의 가(歌)』: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이상하외다. 자신은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하고…(생략)”    


‘창작집단 혼’의 조선최초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의 일대기를 다룬 『인형의 가』는 시대를 잘못만난 어느 여성의 삶을 비춘다. 남성들과의 스캔들로 얼룩진 인형이 아닌, 조선에서 세 아이의 엄마이자 아내이자 화가로 치열하게 살아갔던 ‘인간’을 얘기한다. 또한 동시에 나혜석과 같은 모친을 두었던 장민호의 아픔을 비추며, 소통이 부재한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미학과 교수 장민호는 그를 테마로 한 연극 연출을 위해 제자 이상인을 작가로 호출한다. 그런데 나혜석을 둘러싼 둘의 해석이 엇갈리고 연극은 현재와 나혜석이 살던 과거를 넘나들며 진행한다. 화가로서의 열망과 조선의 여자라는 한계에서 자유로움을 추구하던 나혜석은 유럽에서 최린과 사랑에 빠지고, 남편과 파혼한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잡지에 ‘이혼고백서’를 올려 위선적인 조선 남성의 모습을 당당하게 고발한다.


전통악기와 현대의 드럼과 같은 악기가 조화롭게 어우러지고 인물의 정서 변화는 무용가들의 섬세한 안무로  표현돼 청각과 시각의 농밀함은 연극이 무르익을수록 극에 달했다. 김선영(29)씨는 “입센의 희곡『인형의 집』에서 여주인공 노라가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구속받는 스토리를 한국의 정서와 시대적 배경과 엮은 발상이 참신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변기 속 세상』: “에라이 똥이다!”

 

평생 신의 존재를 의심치 않고 독실하게 지낸 젊은 수도사에게 날벼락이 떨어진다. 그가 일평생 믿은 신이 바로 변기라는 것. 이를 발단으로 수도사, 신자들, 교주까지 모여 그들이 받드는 신의 존재에 대해 논쟁을 벌이게 된다.  ‘극단 이상한 앨리스’의 『변기 속 세상』은 이 과정을 유쾌하면서 결코 가볍지 않게 전개한다. 결국 신자들과 교주는 최후의 실험으로 ‘성체’에 똥을 누고 물을 내려 보기로 하나, 오히려 수도사가 자신의 인생이 부정될까 두려워 이를 거부한다.


2막이 시작하자, 한 때 진실을 알기를 거부했던 젊은 수도사는 진실에 입다물고 현실에 순응한 채 교단의 총무부장이 됐다. 여느 때와 같이 돈을 세던 어느 날 난데없이 젊은 여자가 6살짜리 딸을 죽였다며 회개하러 찾아온다. 영국 왕자 결혼식 피로연에 쓰인 홍차의 가격, 해외 잡지사 사장의 스캔들, 백화점에 진열된 명품 가방과 옷의 가격 등에 대해 속사포처럼 쉴 새 없이 떠들어대던 여자는 지금 세상에선 알지 않아도 될 것 까지 너무 자세하게 알려진다고 열변을 토한다. “과거엔 이렇게까지 자세하진 않았을 거에요!”


진실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이전의 관습이 바뀔까 무서워 매달리는 모습과 자신이 알고 싶지 않은 정보의 홍수에서 허우적대는 모습 모두 우리 현대인이 사는 한 단면이 아닐까.

 

『빈:터』: “지금 난, 당신을 안고있어”

일본인 연출가 오타 쇼고의 대표작『빈:터』는 자신들이 살던 집이 있던 폐허에 되돌아온 어느 중년 부부의 이야기이다. 특별히 눈에 띠는 화려한 소품도, 극적인 이야기 전개 또한 찾아볼 수 없다. 극중 인물도 남편과 아내가 전부로 둘은 담담한 어조로 지난날을 회상한다. 그들이 기저귀를 차고 태어난 이야기, 상처만 남기고 떠난 열여섯 살의 첫사랑, 결혼과 아이들, 그리고 되돌아오지 않는 날들의 소소한 이야기들이다.


빈터에는 대사가 그리 많지 않다. 작품에서 가재도구를 의미하는 약간의 물건들과 흰 천이 소품의 다인 것처럼, 부부의 대화에서도 약간의 말과 침묵이 전부이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소소한 사연과 따스한 기억은 결코 가볍지 않고 관람하는 이에게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아내가 돌아오지 않는 과거에 대해 말하는 대목이 인상 깊다. “아무것도 아닌 날들의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법이죠”


김은선(51)씨는 “평생을 살아온 부부가 있었던 일을 서로 회상하고 보듬어주는 것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며 “시작과 마지막에 남편이 아내를 업어주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잘 짜인 연극 한 편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구속받는 현실을 예술로 극복하고자 했던 여인의 비극적 삶, 넘쳐나는 정보에 대한 현대인의 뒤틀린 수용, 그리고 부부의 소중한 일상과 삶에 대해서까지,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일상에서 놓치고 있던 부분에 대해 다시 되돌아보게 해주니 말이다.

 

임미지 기자 haksuri_m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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