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그들은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나, 유신(維新)의 한국적 민주주의와 5공의 정의사회 구현을 위해 청춘을 바친 투철한 국가주의자들이었다. 안보와 공공질서를 위해서는 기본권에 대한 제약도 불가피하다고 믿었기에, 불과 2백여명의 사망자를 낸 채 마무리된 광주의 폭동에 안도하고, 체육관 대통령의 등장에서 ‘난세에 출현하는 영웅’을 구했던 그들이었다.
제자와 동료들이 감옥과 기관으로 끌려가고 인간처럼 살기를 희망하던 노동자가 제 몸을 불살라도 침묵과 조소로 일관하던 그들이, 세상이 바뀌자 자유와 인권의 전도사를 자처하고 나섰다. 소리 없는 전향이었다.
과거의 굴종을 참회하듯 그들은 발칸에서 벌어지는 반인륜적 범죄행위를 앞장서 고발하고, 지상군 투입을 꺼리는 서방의 비겁과 나약함을 질타했다. 강의실에서, 신문의 칼럼에서, 때로는 늦은 밤의 질펀한 술자리에서. 그들에게 인권이란 모든 권리에 선행하는 일차적 가치였다. “자국민의 인권을 유린하는 국가의 주권은 보호받을 수 없다”는 그들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비장했다. 지난 봄 이 땅엔 온통 박애주의적 코스모폴리탄들 일색이었다.
남방에 자리잡은 조그만 섬나라가 우리사회를 한바탕 휘저어 놓았다. 인구 55만에 면적도 제주도의 3배밖에 안되는 작은 섬. 학살이 시작된 것은 지난 9월이었다. 이곳에 전투병을 파견하는 문제를 놓고 정치권이 격돌했다. 알려진 바대로 사태의 본질은 명백했다. 코소보에서처럼 ‘인권과 주권의 딜레마’ 같은 심각한 난제는 애초부터 없었다. 학살은 동티모르인들의 인권과 주권 모두에 대한 유린이었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에 대한 결초보은의 차원에서 지원군을 파견해야 한다는 정부측 논리가 힘을 얻는 듯했지만, ‘국익’과 ‘교민의 안전’이라는 암초에 걸려 논의는 공전되기 시작했다. 지난 봄 ‘주권국가’ 신유고연방에 대한 나토군의 ‘인도주의적’ 폭탄세례에는 앞다투어 지지를 보내던 인물들이 이번엔 명분보다 실리를 강조하는 철저한 실용주의자들로 변신해 우리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실용주의자들 역시 포크레인 몇 대와 백신 몇 박스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리라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이 전투병 파견에 한사코 부정적인 이유란 무엇인가. 국익과 교민안전을 내세우지만 왠지 석연찮다. 파병은 형식상 인도네시아 정부의 공식적인 요청에 따른 것인데다, 국익이라는 것도 장기적이냐 단기적이냐에 따라 다르게 판단될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기실 이들의 반대논리란 “미국도 주저하는 일에 왜 우리가 앞장서 설치느냐”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보다 인권의 보편성을 강조하던 이들이 정작 그 인권의 보장을 위해 가장 효과적이고 궁극적인 처방인 전투병 파견에 반대하는 논리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궁색하다. 이 대목에선 ‘진보적’이라는 사회·시민단체도 마찬가지다. 동티모르 사태에 대한 정부와 국제사회의 적극적인 개입을 촉구하던 한 두 달 전의 당당함과 열정은 찾아볼 수 없다. 이 문제가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순간부터 이들의 공식적인 논평이나 성명은 자취를 감췄다. 꼬리를 사린 이유가 차후에 떠안아야할 지 모를 비난과 책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면, 그것은 끔찍한 자기분열이자 기만이 아닐 수 없다.
곡절 끝에 한국군 선발대 56명이 지난 1일 1차 집결지인 호주에 도착했다. 지금의 현지사정으론 심각한 무력충돌이 빚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머지않아 동티모르인들은 꿈에도 그리던 독립과 안전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동티모르는 우리에게 치유하기 힘든 상처와 절망을 남겼다. 동티모르가 폭로한 것은 한국사회에 자리잡은 자기기만과 집단적 정신분열이었다. 19년 전의 광주가 그러했듯, 우리는 ‘동티모르라는 원죄의식’에서 한동안은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어두운 대지를 차고 이륙하는 것이 이다지 힘들단 말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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