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시대는 인문학을 부르고 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론인 『소설의 기술』에 보면, 한 개인의 기이한 운명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프라하의 어떤 엔지니어가 런던에서 열린 학술 세미나에 다녀온 직후에 당 기관지를 읽었다. 그의 눈길이 저절로 가 닿은 것은, 서방에서 열린 학술 대회에 참석했던 한 체코 엔지니어가 체코 사회당을 비방하는 성명을 서구 언론에 발표하고는 망명을 신청했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기절초풍할 듯이 놀란 것은 그 엔지니어가 바로 자기 자신이란 사실이었다.
마침 그때 비서가 그의 사무실로 들어오다 흠칫 놀라며, “당신이 어떻게 이리로 돌아왔죠?”라고 묻는다. 그 비서의 눈에 가득한 혼란스러운 기운을 보며 그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불현듯 자신의 존재 근거에 대한 근본적 위협을 느낀 그는 당 기관지의 편집장을 찾아가 항의하지만, 내무성에서 작성했다는 그의 평소 행동에 관한 상세한 기록 때문에 상황은 이미 되돌릴 수 없었다. 그 후로 그는 온갖 고난을 겪으며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 상황을 성찰하는 한편, 이번에는 실제로 진짜 망명자가 되기 위해 모험을 시도하게 된다.
지금 인문학이 처한 양상이 그 엔지니어의 운명과 유사하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한 시대의 시대정신과 밀접한 상관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인문학은 역사의 흐름을 세밀히 읽고 적절한 지향점을 부단히 창출해내야 한다. 하지만 인문학은 그동안 전통적 사유 체계와 이론에 의존하여, ‘포스트모던’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상황과 ‘가상 공간’이라는 극히 낯선 문화적 환경의 도래를 뒷짐진 채 바라보고 있었다.
보다 더 비판적으로 말한다면, 인문학이 새롭게 형성되는 문화의 흐름을 저차원의 담론으로, 또는 자신의 존재를 전혀 위협할 수 없는 일시적 현상으로 치부하는 동안에, 그러한 흐름이 도도한 물결을 형성하며 시대의 주류로 자리를 잡아가게 됨으로써, 어느새 인문학은 주도적 담론의 위치에서 주변부로 밀려나가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문득 그러한 상황 변화를 깨닫고 이제 인문학은 특유의 상징성을 회복하기 위해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형편이다.
그렇다면 이전과 전혀 다른 사회적, 문화적 환경 속에서 인문학은 변방으로 밀려나야 할 필연적인 운명에 처한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위기의 고비에서 인문학은 항상 역동적인 대응을 통해 새로운 지평을 열어 왔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인문학의 위기이자, 새로운 차원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라고 할 수 있다. 박제화된 구시대의 유물처럼 옹색한 구석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것인가, 현실적 상황을 직관적으로 조망하여 이 시대가 요청하는 역동적인 기능을 할 것인가? 바로 이 문제가 현재 인문학이 고민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명제다.
우선 해야 할 일은 인문학이 스스로 신비화시켜 온 추상적인 관념성을 해체하는 것이다. 절대적 진리를 내면에 가진 듯 착각하면서 단선적인 하달 방식에 익숙한 구태를 벗어야 한다. 또한 새롭게 대두하는 문화의 속성을 깊숙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모든 문화 장르를 자신의 영역 속으로 내포시키려는 정성어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 다음 그 모든 문화의 현상을 아우를 수 있는 내적 구성의 원리를 체계적으로 정립해야 한다.
그 토대 위에서 인문학은 현재의 상황을 조망하여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기존의 사유 체계와 이론적 토대는 이미 정태적인 엔트로피로 가득 차 있어 새로운 활성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있다. 굳어있는 전통적 질서에 고동치는 역동성을 불어넣는 작업은 존재의 근본을 재구성해야 하는 극히 어려운 일이지만, 전환기마다 인문학은 그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곤 했다. 그 작업의 본질은 바로 영혼의 심층 구조로 다시 돌아가서, 독창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모든 상황을 점검하여 미래라는 시공간을 향한 비전을 마련하는 일이다.
가상 공간의 가장 주요한 특성은 철저히 익명성을 띤다는 점이다. 개인들이 하나의 개체로서 사고하고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자아를 동시적으로 가질 수 있는 개연성이 확보되기 때문에, 익명의 공간에서는 각 개체가 고정적인 정체성을 가지기보다 가변적이고 복합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소외와 의사 소통의 단절은 초기 산업화 시절에 경험한 것보다 더욱 더 고착화될 가능성이 있다.
가상 공간이 대두하면서 한편에서는 서로간의 의사 소통이 보다 원활해지고 소외가 극복되는 듯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더욱 심화된 소외의 형태와 의사 소통의 단절이 일어나고 있다. 고정적인 자기 정체성이 해체되면서 익명의 공간에서 다양한 복합적 정체성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됨으로써, 이제 서로의 서로로부터 소외나 의사 소통의 단절이 아니라, 현상적인 자아의 본질적인 자아로부터의 소외와 의사 소통의 단절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소외된 인간은 그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떨어져 있듯이, 그 자신으로부터도 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인문학은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 모든 가치 체계가 분열되고 의미가 해체되는 이 시대에 인문학은 새로운 지향점을 추구해야 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 최근에 우리의 영혼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승려와 철학자』라는 책의 내용은 의미있는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은 프랑스의 언론인이자 철학자인 장프랑수아 르벨이, 분자 생물학 분야에서 탁월한 연구 업적을 내며 젊은 과학도로 촉망 받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티벳으로 불교의 지고한 정신적 가치를 배우러 떠났던 아들 마티유 리카르와 나눈 대담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존의 형이상학에 공허감을 느낀 르벨이 이제 중년에 접어 든 아들과 절대적인 진리가 무엇이냐는 명제를 놓고 대화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은 우리가 일시적인 현상이나 개념에 매이지 말고, 자유로운 정신의 드높은 공간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점으로 수렴되고 있다.
지금 이 시대는 인문학에 이러한 새로운 이념을 창안해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다. 그런 시대적 소명을 이뤄내는 일은 인문학이 새차원으로 도약해갈 수 있는 다시없는 기회일 수 있다. 이 시대 전체를 선도해 나갈 수 있는 새로운 이념의 창출은 인문학에 부여된 시대적 소명이라 할 수 있다.
롤랑 바르트가 『역사의 담론』에서 말하고 있듯이, 인간의 삶과 문화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 있는 가장 기본적인 층위는 ‘내러티브’다. 새로운 이념의 창출과 더불어 인문학이 해야 할 것은 새로운 독창적 내러티브를 정립하는 일이다. 이때, 가장 깊숙이 고려해야 할 것은 다른 예술, 문화 장르와의 상관적 관계를 맺는 방법이다. 이제 가상 공간이라는 멀티미디어의 환경에서 영화, 미술, 음악은 더이상 인문학적 담론과 변별되지 않는다. 인문학은 이들 예술 장르나 새로운 문화 장르로 대두하는 만화까지도 역동적인 우군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이들 다른 장르들을 인문학의 하부 장르로 삼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자격에서 이들과 대화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인문학이 주가 되고 이들 장르가 종이 되는 구조로는 역동적인 융합을 이뤄낼 수 없다. 바흐찐이 말하고 있는 ‘크로노토프’의 개념을 원용하여 가상 공간에 맞는 동시성의 개념과 복합적 공간성의 개념을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 특히 폐쇄적인 익명의 공간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들이 적응하기 쉬운 서술의 양식을 도입해야 한다. 서로의 개념을 동시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입체적, 다방향적 관계의 개념이 정착되어야만 인문학이 비로소 새로운 이념 창출의 근거를 마련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새로운 세대의 언어적 체계에서 드러나는 어법이나 구조적 현상을 직시해, 내러티브의 의미와 기능을 적절히 변주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현상의 계속적인 나열과 잘 짜여진 삶의 도식의 단선적인 전개에 익숙한 흐름을 더디게 할 필요성이 있다. 무언가를 지향하는 듯하지만, 그 함축 의미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는 일상의 흐름을 더디게 해서, 그 지향점이 가지는 의미를 도출하고 그것과 현상과의 상관성을 밝히는 작업을 해야 한다. 또 하나는 편리성과 효율성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개념의 자동화를 끊어내어, 이를 비자동화시켜야 한다. 사유의 단선적인 방향성, 여운이 없는 단조적인 소리들에 사유의 다의미성과 다층성을 부여해주는 작업을 인문학이 해야 한다.
또 하나의 ‘세기말’을 겪고 있는 바로 지금, 동시대는 인문학을 부르고 있다. 동시대가 요청하는 일은 비록 어렵고 힘든 것이지만, 서두르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씩 올곧게 천천히 음미하며 걷다 보면, 인문학은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의미있는 영역을 또다시 창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문학만이 불빛하나 없는 어두운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은 이 시대의 무의미한 흐름에 환한 등대를 달 준비를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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