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에 던져진 기억의 그림자를 찾아

춘천을 향하고 있는 기차는 이제 막 도시의 매캐한 공기 속을 빠져나와 시원스럽게 내달리고 있다. 아침에 비가 내린 탓인지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한 산과 들판은 물기를 머금은 채 각기 더욱 선명한 빛을 발한다. 아직까지 나의 호흡기관이 도시의 매연을 걸러내지 못한 이유일까. 녹빛과 황금빛들 사이에서 내 몸은 여전히 회색인 듯한 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출발한 지 두 시간이 채 못 돼 기차는 춘천역에 정차했다. 우리가 가려는 곳은 ‘춘천에서 강 하나를 건너 삼사십 리 길의 샘골’. 행정구역상으로 춘천시 사북면 인람리에 속하는 샘골은 바로 아베와 김진호의 어머니가 신접살림을 시작했던 바로 그 곳이다. 기형아인 이복형 아베의 행방을 찾아 샘골로 향하는 김진호의 행로를 우리 역시 좇아가본다.
춘천시 북쪽에서 화천 쪽으로 뻗어 있는 407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가슴이 탁 트이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담담하게 서 있는 산들은 평평하고 드넓은 호수 위로 녹색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평안하게 만드는 풍경이 또 있을까’ 진호를 따라나선 미군병사 토미의 입에서 연이어 나오는 감탄사는 전혀 과장이 아니었을 듯하다. 풍경에 취한 채로 계속 길을 따라가다 보면 ‘충효정’이란 정자가 나온다. 그 곳에서 왼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호수는 잠시 모습을 감추고 논밭이 나타난다.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도 ‘샘골’로 보이는 마을은 나타나지 않는다. 혹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닐까. 엉뚱한 산 속을 헤매게 되는 것은 아닐까. 불안한 마음에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인람리가 어디예요?”/ “길 따라 쭉 올라가다가 이 길이 끝나는 데가 인람리예요.” 꽤 깊은 산 속이다. 저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긴 했던 것일까.
시멘트로 포장된 일차선도로를 계속 따라 들어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김진호, 그는 왜 아베를 찾아나서는가. ‘쓸모없는 강아지보다 더 역겹고 귀찮은 그런 존재’일 뿐이었던 그의 형 아베. 그를 버리고 이민을 가서도 죄책감 대신 그를 향한 증오심만 키웠던 진호가 4년 만에 돌아온 한국에서 그를 다시 찾으려는 이유는 뭘까. 단지 그의 어머니의 수기 때문만은 아닌 듯 하다.
마침내 우리도 진호일행이 이르렀던 구멍가게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인 그 가게 뒤쪽이 바로 샘골인 듯했다. “할머니, 여기가 샘골인가요?”/ “샘골이 아니라 샘말이었지. 지금 저기가 샘말이었어.” 길 옆을 쓸고 계시던 한 할머니가 가리키는 손 끝에는 드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한때 남사북면 면사무소 소재지였던 샘골. 소설 속에서 진호 일행이 들은 것처럼 샘골(샘말)이란 마을은 지난 65년 춘천댐 공사와 함께 수몰되었다고 한다. 80여 가구가 보상비를 받아 도시 또는 타지로 옮겨갔고 아홉가구만 산기슭으로 집을 옮겼다는 이야기는 소설 속의 허구가 아니었다.
그 곳은 또 하나의 다른 세계였다. 겹겹이 둘러쳐진 산들 사이를 메우고 있는 반짝이는 호수와 그 위에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는 여유로운 낚시꾼들. 마치 아무일도 없었고 앞으로도 아무일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듯 평화로운 고요함이 둘러싸고 있었고 산과 호수와 하늘이 서로 어울려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수몰돼 버린 이 마을은 50여년 전 전쟁의 광기에 휩싸여야만 했었다. 38선이 가까웠던 탓에 북으로 또는 남으로 이동하는 군인들의 발에 무참히 짓밟혀야했던 그들의 삶, 6·25에 의해 뒤틀려버린 가족사가 『아베의 가족』 속에는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아베는 어쩌면 전쟁이 우리에게 남겨 놓고 간 상처의 자국인지도 모른다.
아베의 가족은 아베를 의도적으로 버림으로써 그들의 상처를 망각하려 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 자체가 상처를 오히려 악화시키는 계기를 가져 왔던 것이다. 진호가 아베를 찾아나선 이유가 아베에 대한 동정심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풀리지 않는 삶의 매듭을 풀기 위해, 또한 그의 어머니를 이해하기 위해 아베를 찾은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어느새 증오와 미움이 아닌 화해의 방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지난 일들을 품 속에 간직하고 그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있는 듯한 드넓은 호수는 하루의 마지막 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살며시 내려앉고 있는 어둠을 피해 발길을 돌렸다.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