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의 가족』 속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가 3년 10개월 만에 한국 파견 지원병이 되어 돌아온 나(진호)는 어머니의 수기가 적힌 대학노트를 손에 들고 형 아베를 찾아나선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는 1950년 6·25 사변이 일어나기 두달 전 4월 최창배씨와 결혼했고, 남편이 서울에서 유학하고 있는 동안 시골 시가에서 1년간 시집살이를 했다. 시가는 춘천에서 강 하나를 건넌 삼사십 리 길의 ‘샘골’이라는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시부모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아가던 어머니는 남편의 아이를 잉태한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6·25 사변이 터졌고, 생전 처음 보는 군대들이 마을을 휘젓고 다녔다. 시아버지는 그 와중에 인민군에 의해 죽게 되고 남편 역시 의용군으로 끌려가게 된다. 또 인민군들이 퇴각하고 춘천에 미군들이 들어왔다는 말을 들은 날, 흑인 병사들이 집안에 들어와 시어머니와 어머니를 강간했다.
그 해 겨울 동짓달 어머니는 8달 만에 아이를 낳았으나 그 아이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 애는 네 살부터 겨우 기기 시작하여 다섯 살 때 갓난애처럼 겨우 걸어다녔다. 그것도 사지를 뒤틀면서 아주 어렵게 일어서서 걸었다. 입을 벌려 소리낼 수 있는 것은 고작 ‘아…아…아…베’였다. 전쟁은 끝났지만 남편은 소식이 없었고 어머니는 시커먼 짐승들에 대한 증오를 품은 채 시어머니와 함께 남편을 기다리며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내가 대문 밖에서 놀던 아베를 안고 집으로 들어왔고 한 집안에 기거하게 된다. 얼마 후 시어머니는 어머니를 부르더니 지금의 내 아버지인 그 남자와 집안에서 나가라고 윽박질렀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울 어느 가난한 동네에서 새살림을 차렸다.
아베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전쟁 중 자신이 죽인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속죄 심리였다. 아버지는 죄책감 때문에 무기력했고 어머니는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항상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는 우리 형제 4남매가 태어났으나 집안은 아베로 인해 항상 음습하였고 나는 그러한 환경을 핑계로 점점 비뚤어졌다.
그러다가 6·25 때 헤어졌던 고모를 만나게 되고 미국으로 건너간 고모로부터 이민 초청장을 받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부푼 기대로 들떴으나 이민법상 신체부자유자인 아베는 함께 미국으로 갈 수 없었다. 미국으로 떠나는 날 어머니는 아베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서 오랫동안 있다가 혼자 돌아왔고, 미국에 도착한 어머니는 그날부터 멍청해졌다.
어머니의 수기에는 아베의 행방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나는 아베가 샘골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국인 친구 토미와 함께 그 곳을 찾았다. 그러나 그 마을은 댐 공사로 인해 이미 수몰 지구가 되어 있었고 아베의 할머니는 죽고 없었다. 나는 구멍가게 노파로부터 아베의 할머니가 며느리를 내쫓은 것은 그 젊은 며느리의 앞날을 생각해서 일부러 그랬다는 것, 그리고 손자까지 내보낸 것을 무척 후회하다가 죽었다는 것, 그 후 며느리가 병신 자식을 데리고 나타나 시어머니의 무덤에서 애통해 하고는 아베를 데리고 어두워진 산비탈을 걸어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나는 우리 형 아베의 행방을 찾는 일도 우선 그 무덤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토미와 함께 그네들의 무덤을 향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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