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우에게
우연히 오쇼 라즈니쉬가 예수에 대해 쓴 책을 읽게 됐는데 이런 문구가 있더구나. “모든 혁명은 성공을 꿈꾸기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 … 예수는 혁명가가 아니라 반역자이다.”
혁명, 혁명가. 한동안 잊고 살았던 단어인 듯했다. 80년대 많은 선배들과 열사들의 피를 들끓게 했던 단어, 혁명. 그런데 이 단어에 한동안 시선이 머문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나는 익히 예수가 민중을 구원하려는 혁명가였다고 알고 있었는데, 예수는 혁명가가 아니라 반역자라니? 그리고 또 한가지 이유는 대학원 원주학생회 건설을 준비하며 이러한 자치기구 건설의 목적이 80년대처럼 혁명을 위해서인가 고민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혁명에 대해, 좀 더 정확히 알고 싶어졌다. 사전을 찾아보니 혁명에는 세 가지 뜻이 있었다. 첫번째는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서 국가의 기초, 사회의 제도, 경제의 조직을 급격하게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 두번째는 피지배 계급이 지배 계급의 정치권력을 빼앗아 정권을 잡는 일, 끝으로 종래의 관습·제도·방식을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세우는 것. 이 세 가지 의미에서 공통적인 것은 ‘과거와 반대로 빠른 시일 안에 새롭게 바꾸는 것’이다.
라즈니쉬가 예수를 혁명가라 부르는 것을 거부한 데는 혁명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혁명은 성공하기 위해 조직하며 조직하는 가운데 체계를 갖추기 때문에 혁명이 애초에 추구한다던 반체제가 성립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즉 반체제 역시 체제가 돼버리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랄까.
그런데 라즈니쉬는 아쉽게도 학생회 자치기구 건설에서의 혁명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니 이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야 할 몫인 것 같구나. 과연 현재의 학생회는, 그리고 곧 출범할 대학원 원주학생회는 혁명을 위해 건설돼 있는 것일까?
승우야, 제1대 대학원 원주학생회 회장이 된 것을 축하한다. 학생회를 이끌어갈 학생회장의 위치에서 학생회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해야겠구나.
승우야, 우리가 과거와 반대로 빠른 시일 안에 새롭게 바꿀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일단 학내 문제부터 생각해 보면, 등록금 문제가 있을 것이고 부족한 장학금 문제, 공간부족 문제 등이 있겠지. 그리고 바보한국21(BK21)사업, 국가보안법 철폐, 남북통일, 기업 비리 척결 등이 있겠구나.
새롭게 바뀌어야 할 사안들을 보면 학생회에서 할 일(혁명)은 아직도 많은데 왜 우리는 혁명이란 단어를 잊고 산 것일까?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학생회가 솔선수범하여 혁명의 불씨를 만들어야 할 때인 것 같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선배들이 합심하여 거리로 나서고 열심히 싸웠던 이유는 옆에 있는 친구가 얻어 맞고 죽어갈 때였던 것 같다.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예의가 무시될 때 일어나는 용기. 앞선 혁명에 대한 정의에서 변화의 중심은 인간이어야 할 것 같다.
인간이 인간으로 대접받는 사회·학교를 위한 학생회.
승우야, 아무리 세월이 변했어도 학생회 활동의 중심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인 것 같다.
PS: 라즈니쉬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예수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민중사랑 실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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