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지구촌 시대가 도래했다. 세계는 하나가 됐고, 우리나라 가수들이 세계의 아이돌로 부상하면서 한국가요는 세계의 음악이 됐다. 하지만 아이돌 가수들의 가요가 글로벌 스탠더드일 뿐, ‘한국의 정’을 담아낸 음악이라기엔 무리가 있다. 이 때문에 해외동포들은 여전히 옛날 가요를 찾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 중심에 그들이 바라던 음악을 전하는 「가요무대」가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 구수한 입담과 말솜씨로 우리 음악을 소개하는 이가 있다. ‘한국의 소리’이자 우리나라 대표 아나운서, 김동건 동문(교육심리·58)을 만나봤다.

 

라디오와 함께 피어오른 ‘한국의 소리’의 꿈

제법 바람이 쌀쌀해진 어느 초겨울에 만난, 반세기동안 우리나라의 ‘소리’로 자리매김한 김 동문. 강산이 다섯 번이나 바뀐 긴 세월의 속에서도 그의 입담과 말솜씨는 여전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아나운서의 세계로 이끌었을까. 주인공은 바로 김 동문의 집에 있던 라디오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그땐 왜 그리 멋졌는지 몰라요.” 스피커를 따라 흘러나오던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맞춰 신문을 대본삼아 연습하던 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그의 방을 가득 채웠다. 목소리가 아나운서와 같아서 방 밖에서 듣고 있던 이웃들은 실제 방송하는 줄 알았다고 칭찬했을 정도.


이런 그에게 동네 어른들은 변호사가 되길 권했다. 말을 조리 있게 잘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나운서의 꿈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그의 꿈은 여전했다. “경기중을 다닐 때 수련회나 수학여행 사회는 제가 도맡아 하곤 했어요”라며 그는 지난날을 추억했다. 당시 그의 말솜씨는 라디오 방송을 청취하고팠던 친구들에게 점심시간마다 신문기사를 읽어주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꿈을 향해 다가갔다.

 

 


‘진리와 자유의 소리’에서 ‘한국의 소리’가 되기까지

 문득 김 동문의 대학생활이 궁금해졌다. 지금도 브라운관에 나타나는 그의 반듯한 모습은 자타가 공인하고 있기 때문에 대학생 시절 역시 모범생의 전형으로 별반 다르지 않았으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는 “제 대학생활은 공부만 하는 학생이 아닌 이른바 ‘낭만’을 즐기는 학생이었습니다”라며 이를 부정했다. 그럼에도 그는 낭만을 즐기면서 그는 아나운서의 꿈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는 연세교육방송국(YBS) 아나운서로 활동했고, 재학 중에도 기성 언론의 아나운서 시험에 응시했다. 그의 아나운서에 대한 갈망이 너무 커 나이도 실제 나이보다 많게, 미필자였음에도 군필자라고 속이면서 시험에 응시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대졸 이상 학력 소지(예정)자’라는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마지막 관문에서 낙방했다.


하지만 한 우물을 파면 반드시 기회가 온다는 옛말처럼 김 동문은 마침내 4학년 2학기 복학 이후인 1963년 당시 동아방송 아나운서 공채모집에 최종합격했다. 하지만 학력 조건은 여전히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 때 대학가에는  학업을 우선 마치고 사회로 진출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어요. 그래서 교수님들께서는 엄연히 재학생인 제가 출석하지 못하자 학점을 안 주셨죠. 결국 1년이나 학교를 더 다녔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김동길 명예교수(우리대학교·서양사)는 그의 꿈을 가능케 해준 은인이었다. 당시 교무처장으로 재직 중이던 김 교수는 그의 사연을 듣고 “사회가 원하는 인재가 된 그에게 오히려 학교가 족쇄가 돼선 안된다”며 그의 졸업을 가능케 해줬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때의 은혜는 잊지 않고 항상 감사히 여긴다고.


이처럼 다사다난한 대학생활을 한 김 동문은 남다른 애교심으로도 유명하다. 우리대학교 대부분의 행사 사회자를 도맡아 했던 것은 물론이고 각종 학내 기부활동에도 앞장섰기 때문이다. 그는 “말썽꾸러기였던 저를 챙겨주신 은사님들과 평생을 함께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던 우리대학교가 있었기에 오늘의 제가 있었습니다”라며 애교심의 시작을 대학생활의 추억으로 꼽았다.

 

'한국의 소리’로 살아가는 법 

 

우여곡절 끝에 아나운서가 된 김 동문이었지만, 아나운서가 된 뒤에도 그의 생활은 마냥 순탄치 않았다. 그의 합격 자체가 갈등의 씨앗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나운서를 꿈꾼 그에게 부모님은 굳이 ‘배고픈’ 직업을 택해야 하냐며 반대를 했던 것이다. “결국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몰래 아나운서 시험에 응시했어요. 합격 통보를 받고나서 3년 동안만이라도 일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린 뒤 겨우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아나운서가 되길 반대했던 그의 어머니는 정작 그가 텔레비전 브라운관에 등장하자 동네가 떠나갈 정도로 크게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어려움은 그렇게 끝나는 듯 했다. 하지만 방송국내에서의 어려움은 여전했다. 프로그램 진행자로서 예상치 못한 개편으로 더 이상 정든 프로그램의 사회를 보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특히 지난 1985년부터 지금까지  출연중인 「가요무대」를 잠시 떠났을 때는 굉장히 아쉬웠다고.

 

 


아나운서 일뿐만 아니라 외부의 유혹 역시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 역시 반듯한 이미지와 뛰어난 말솜씨로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정계 입문의 권유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거부했다. “나는 아나운서를 평생 꿈꿔온 사람으로 이 길이 내 길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아나운서에 대한 신념과 직업에 대한 자부심으로 결정했기 때문에 내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김 동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방송활동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제5공화국 당시 북한을 방문했던 경험을 꼽았다. 당시 이산가족을 포함한 예술인과 기자단 150명과 함께 남북 동시 상영 공연의 사회자로 북한에 방문하게 된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느꼈던 언어의 차이와 살벌한 분위기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며 당시를 기억했다. 그는 “북한에서 ‘음향실’을 ‘소리초소’로, ‘방송한다’를 ‘전투한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신기할 수 없었어요”라며 그때의 생경함을 되새겼다.

 

영원한 ‘한국의 소리’가 되고 싶어

우리 곁에 항상 KBS의 ‘간판 아나운서’로 남아있을 것 같던 김 동문은 1993년 돌연 프리랜서가 되기를 선언했다. 정년이 가까워지면서 후배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조금이나마 일찍 물려주기 위해 사실상 은퇴를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여전히 그의 소리를 그리워했고, 오늘날까지 김 동문은 왕성하게 활동중이다.


김 동문은 아나운서 후배들에게  정의로운 아나운서가 되길 충고한다. 그는 직업 특성상 여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냉철한 판단을 요구한다는 점 역시 덧붙였다. 한편 아나운서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고려하고 그 직업이 자신을 원하는지 고민해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마지막으로 김 동문 자신에게 아나운서란 과연 무엇인가 물어봤다. “아나운서는 제게 또 다른 이름입니다. 제게는 김동건, 가요무대, 그리고 아나운서라는 세 개의 이름이 있거든요.” 여건이 허락하는 한 아나운서로 꾸준히 활동하고 싶다는 그의 말에서 여전히 ‘열정’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글 · 사진 유승오 기자 steven103@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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