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너머의 꿈을 꾸는, 고도원씨를 만나다

 

 

 

새까맣고 촌티가 풀풀 나는, 작고 못생긴 소년이 있었다. 시골교회의 가난한 목사 아들로 태어나 도시락 없이 학교에 다녔고, 겨울에 온전한 양말을 신은 기억조차 없다. 잘 웃을 줄 모르고 늘 심각했던, 하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던 소년은 「중앙일보」기자에서 대통령 연설담당비서관을 거쳐 현재는 2백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가진 이메일 서비스 ‘고도원의 아침편지’의 운영자가 됐다. 또한 오랜 꿈이었던 60만평 규모의 아침편지 명상센터의 설립자이자, 꿈과 사랑에 관한 베스트셀러를 몇 권이나 가지고 있는 인기 작가이기도 하다.

여기까지는 ‘가난 극복 유형’의 평범한 인간승리 영웅담이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단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세상과 맞부딪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한 남자의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글 쓰는 게 좋아서

학창시절, 5년간 짝사랑한 소녀의 마음을 움직이는 편지를 쓰기 위해 셰익스피어 전집을 다 읽고,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줄줄 외웠다. 하지만 어린 문학 소년은 부모님의 설득 끝에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우리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했다. “우등장학생이었지”라고 말하고는 “1학년 때까지는”하며 전제를 붙인다. 1학년 때까지, 즉 고씨가 「연세춘추」에 들어가기 전까지다.

얌전히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면 좀 더 평범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연세춘추 기자가 되면서 내 인생이 바뀌었지”라는 그의 말처럼, 「연세춘추」기자생활은 그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거친 민주화 시대, 고씨는 기자의 실명을 걸고 쓰는 ‘십계명’이라는 칼럼 코너를 최초로 만들었다. 하지만 격변의 시대상황 속에서 고씨가 쓴 칼럼이 문제가 되면서 그는 학교에서 제적된 것은 물론, 구치소에서 ‘콩밥’을 먹다가 다시 군으로 강제 징집됐다. “당시 제적생은 전적대학교 뿐만 아니라 타대학교에도 입학할 수 없는, 한마디로 인생 종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라고 말하며 고씨는 웃었다. 당시 주변 사람에게 고씨는 ‘미래가 없는 청년’이었다.

인생의 거친 파도와 마주할 때

“심리적으로는 울분 상태고, 가슴은 터지려하고, 정말 칼만 안 들었다 뿐이지 온 세상이 다 지진 나서 무너졌으면 좋겠고.” 이러한 당시의 절망은 단순히 마음의 고통에서 끝나지 않고 현실의 문제로 다가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현실적으로 쥐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아내와 전기밥솥 하나만 가지고 결혼을 해야 했다. 결혼식을 하고 나서 친구들에게 신혼여행을 간다고 인사하고는, 돈이 없어서 신혼 방에 들어가 일주일을 숨어 지냈다. 고씨는 살아가기 위해 글쟁이로서의 자신을 잊고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포장마차를 하려다 접었고, 문방구를 하려다 사기를 당했다. 이화여대 입구 아현동 고갯마루에 ‘행복의 문’이라는 웨딩드레스 가게를 열어 5년 동안 웨딩드레스 디자이너 생활을 하기도 했다. ‘앙드레 고’라는 이름으로 빵모자를 쓰고. 팔자에도 없을, 자신의 꿈과는 거리가 먼 나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엔가, 깊이 내재된 문학청년의 본능이 글을 쓰고 싶다고 그를 쑤셔댔다. 마침 잡지 『뿌리 깊은 나무』가 창간됐고, 그곳의 기자가 됐다. 기자가 된 것이, 글을 쓸 수 있는 것이 너무 기뻐서 가장 열심히 기사를 쓰고 가장 일찍 출근하는 기자가 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잡지가 강제폐간됐다. 누가 일부러 불행을 터뜨리기라도 하듯 끝없는 고난의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그러던 중 「중앙일보」에서 기자 경력을 인정해 입사시험 없이 그를 스카웃 했다. 드디어 길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중앙일보」기자가 된 후,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던 그의 인생 곡선은 오랜 시간 끝에 방향을 틀었다. 17년간의 기자 생활 뒤 대통령 연설담당 비서관을 5년동안 맡았고, 자신의 이름을 건 이메일 서비스 ‘고도원의 아침 편지’까지 시작하게 된 것이다. 

온갖 일을 거쳐 온 그는 도인이 된 듯 했다. “행복은 이미 자기 손 안에 있는데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행복을 찾아 헤맨다”는 게 그의 말이다. 과거에 불행이라고 생각했던 것조차도 돌이켜보니 행복의 조건이었고, 그것이 오늘날을 더 행복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행복은 요즘 대학생들의 힘든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것 같다’라는 기자의 말에 고씨는 “힘든 것이 희망이야”라고 답했다. 힘듦의 바닥까지 내려가는 것을 즐기는 것, 그것이 희망이라고 그는 말했다. 지금의 고통이 나중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로 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열심히 그 고통을 즐기라 했다. 목숨을 걸고 살라고 했다. 다만, 목숨을 버리지는 말고.

꿈 너머 꿈을 꾼다

구체적인 꿈을 가지고 있지 않은 대학생들을 향해 고씨는 “학교 가는 길은 눈에 보이는 한 가지 길을 오가는 것에 불과하지만 꿈길은 수없이 많지”라고 말했다. 꿈길은 가상의 세계고, 가지 않은 세계이므로 무수한 꿈이 존재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꿈을 이루고 싶을 때 ‘그걸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전공을 살려 적당한 직업을 가지고 돈 벌고 인생을 즐기는 것은 평범한 꿈에 그치지만 꿈을 넘어선 무엇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꿈 자체가 ‘위대’해지기 시작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냥 월급쟁이가 아닌,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하면 세상을 보는 시야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의미 있는, 다른 사람의 성공과 행복에도 징검다리가 되는 꿈이면 그 꿈만으로도 자기 삶이 위대한 길을 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이미 모든 것을 다 깨친 ‘도인’의 얼굴이었다.

그의 꿈 너머 꿈도 계속 성장하고 있다. 아침편지 명상센터를 세워 사람들과 희망을 공유하는 꿈이 그것이다. 처음 아침편지 명상센터를 세우겠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충주시의 도움과 아침편지 독자, 그리고 자신의 힘을 합쳐 60만평의 거대한 아침편지 명상센터를 세웠다. 아침편지 명상센터 ‘깊은 산속 옹달샘’은 그의 꿈이 자라고, 사람들의 꿈이 자라는 공간이다. 지친 사람들이 명상하고, 심신을 달래 다시 꿈을 꾸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꿈 너머 꿈을 누구보다 훌륭하게 이뤄나가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미래에 국제 청소년 캠프가 이곳에 설치되길 바라면서 꿈을 이뤄나갈 궁리를 한다. 국경이 없는 세계화 시대를 맞아 사람들이 서로 인적 네트워크를 이루고 서로의 꿈을 지원해주는 후원자도 되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이다. 

또다른 ‘꿈 너머 꿈’으로 고씨는 아침편지를 전 세계인과 나눌 수 있는 시스템을 계획하고 있다. “아침편지를 영어로 번역해 페이스북에 올려서 전 세계 사람들이 아침편지 한편을 읽고 혹시 인생이 바뀐다면 나의 인생이 헛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이제 꿈을 현실로 만드는 방법을 완전히 체득한 듯 했다.

그리고 자라나는 꿈

“꿈도 자라나. 성장한다구. 꿈은 생명력을 갖고 있어요” 마치 꿈이라는 종교의 광적인 신자이기라도 하듯, 고씨는 끝없이 꿈을 말했다. “처음에는 작은 꿈이 이뤄지는 경험을 통해 확신이 생기고, 자기 꿈을 적어놓고, 또 말하고…”로 이어지는 그의 말을 계속 들으니 왠지 ‘꿈’ 다단계 영업사원 같다. 그래도 한번만 눈 딱 감고 믿고 싶어진다. “꿈을 말할 때는 황당하고 때로는 미친 사람이 아니냐 하는 소리를 듣고 비난받고, 조롱 당하고. 하지만 결국엔 그 꿈이 이뤄지는 경이로운 체험을 하게 돼요”라는 고씨의 말. 산 증인의 말이니 어쩐지 믿어 봐도 좋을 것 같다. 

*소네트 : 유럽의 정형시의 한 가지

 

 

 

남혜윤 기자  elly@yonsei.ac.kr
사진 박동규 기자 ddonggu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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