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호 여사, 신념과 함께 인고의 세월을 걸어오다


동교동의 한 저택은 오늘도 참새들을 맞이했다. 왠지 오늘은 새들이 자기 가족들을 모두 데려온 모양이다. 안마당 한가득 새들이 모여서 모이를 달라고 지저귀고 있다. 새들의 지저귐만 가득한 이 동교동 저택은 한때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던 곳이다. 유신 정권 시기에는 상시 중앙정보부원과 외신 기자들이 집 앞을 지키고 있었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 매번 대통령 선거철이 오면 사회 각계 인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리고 15대 대통령 선거 결과가 나온 날 밤, 이 집 앞에는 청와대 경호팀의 차가 왔다. 바로 이 저택의 주인인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를 청와대까지 경호하러 온 것이다. 그리고 13년이 지난 지금, 이 주택에는 곱게 늙은 이희호 여사만이 참새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꺾기기엔 이른 90

“여긴 남학생들이 나이가 많네요?”

이 여사가 동교동 저택 거실에서 기자와 같이 들어오는 비서들을 보고 농담부터 내민다. 그리고 이 여사가 악수를 청하는데, 기자는 크게 놀랐다. 손을 꽉 쥐는데 아팠기 때문이다. 올해로 90세가 되는 이 여사는 그렇게 정정하다.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해서도 기운 넘치게 대답한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매주 화요일과 토요일에는 현충원을 들리고 있습니다. 가끔은 지방 강연을 가고 그곳의 불우이웃시설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해남의 ‘등대원’이라는 보육원에 들려 부모없이 외롭게 사는 아이들을 격려했단다.

그의 60년 전에는 여자도, 남자도 아니었다

인터뷰한 날 이 여사는 21살인 기자보다 곱게 차려입고, 더 바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소싯적의 그녀를 엿볼 수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을 만나기 전까지 그녀는 활발한 사회운동가였다. 특히 여성의 인권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여성과 남성은 결코 동등한 위치가 될 수 없었다. 그녀가 다니던 서울대 사범대학에서도 여학생들은 신입생 환영회에서 수줍게 고개를 들지 못했고, 남학생들은 술을 마시고 호탕하게 놀았다. 그녀는 이러한 불공평을 참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후배  여학생들에게 고개를 들 것을 주문하고, 모임에서는 여학생들을 위해 사이다를 준비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녀의 별명은 독일어로 중성을 뜻하는 'das'가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서도 남녀평등은 그의 꿈이었다. YWCA(대한 여자 기독교 연합회, Young Women’s Christian Association) 총무를 역임하며 남녀평등과 여성권익 신장 등 여성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일했다. 당시의 남자들은 종종 본처를 두고서도 첩을 들이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본처가 직접 동사무소에 가서 혼인신고를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기 때문에 첩으로 들어온 여자가 혼인신고를 하면 첩이 본처가 되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여성단체들과 연대하여 혼인신고 캠페인을 펼쳤다. 이 여사는 자신의 활동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당시에는 지금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남녀가 여러 면에서 불평등 했습니다. 여성들은 교육도 제대로 못받고 사회에서도 차별대우를 받았습니다. 저는 이것들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더욱 여성운동에 매진했습니다.”

여느 부부들과는 다른

그녀의 이러한 사회활동은 김 전 대통령을 만나고 많이 달라졌다. 김 전 대통령과 결혼하고서 그녀는 여성권리를 위해 연설을 하는 대신, 왜 유권자들의 대표로 김대중을 뽑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연설을 했다. 그리고 이렇게 정치에 발을 들이면서 김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앞에는 가시밭길이 펼쳐져 있었다.

민주화가 아직 정착되기 전, 민주주의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열망은 정부의 조직적인 대응으로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공산주의자로 몰렸다. 그리고 두 부부는 가택 연금, 감옥살이, 외국 망명, 사형선고까지 정말 파란만장한 삶의 파도를 함께 넘어야 했다. 이 여사는 “군부 독재시절에 남편은 일본에서 납치돼 죽을 고비까지 넘겼습니다”라며 “그때마다 저희는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국민들이 지지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버텨왔습니다”고 말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 또한 그녀가 그 시간들을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녀는 살얼음판을 걷는듯한 정치판에서 언제나 남편 김대중을 지지했다. ‘3.1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해 이 여사의 남편과 다른 각계의 민주 인사들이 구금됐을 때다. 첫 공판을 앞두고 그녀는 관련자 부인들과 함께 입에 검은 십자가 테이프를 붙이고 시위를 했다. 또한 재판이 있는 날이면 무궁화를 상징하는 보라색 한복을 입고 민주주의가 써진 부채를 들었다. 그리고 길거리를 ‘쑤시고’ 다녀 소위  ‘닭장차’로 불리는 경찰버스에 갇히기 일쑤였다.

이 여사가 그렇게까지 ‘내조의 여왕’이 될 수 있도록 만든 원동력은 무엇인가. 자서전 『동행』에서 그녀는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보다는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 되었습니다”고 말한다. 사랑은 변할 수 있지만 꿈은 변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보다 강한 신뢰가 있었기에 두 부부는 40여 년간 함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여사의 신뢰는 특별했다. 김 전 대통령의 가장 큰 매력에 대해 물었을 때, 이 여사는 길게 설명했다. “어떠한 난관이 있어도 자신의 원칙을 확고히 지켰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국민을 믿고 역사의 평가를 기대했습니다. 또 안으로는 배려심이 많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남편을 존경합니다.”

이러한 신뢰는 결실을 맺어 김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는 지난 1998년 2월, 청와대에 들어가 5년간 ‘국민의 정부’를 운영한다.

다시 동교동의 안주인으로

5년간 국민의 정부는 외환위기를 타개하는데 힘썼고 민주주의와 여성권익, 그리고 국가인권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분명 몇 가지 아쉬운 점은 있었지만 여사는 이러한 성과는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임기가 끝나고 돌아온 동교동 저택은 더 이상 옛날의 동교동 저택이 아니었다. 30년 전만 같으면 김 전 대통령이 동교동 저택에 돌아오는 경우는 감옥에서 풀렸거나 망명생활을 끝내고 올 때였다. 그리고 이것은 곧 정치계에서는 ‘새로운 재개’를 뜻하는 것이었고, 이희호 여사는 남편과 수많은 기자들을 만나야 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고 노부부는 동교동 안마당에서 새들에게 모이를 주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다. 이 여사는 “둘만의 시간도 많이 가졌던 퇴임 후가 가장 행복했습니다”라고 고백한다. “봄, 가을에는 꽃 구경을 하고, 한강으로 드라이브도 하고, 특히 남편은 연세대 캠퍼스에 핀 진달래 꽃을 구경하기 위해 매년 연세대에 갔습니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전까지 그들은 여느 노부부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정치인 김대중이 아닌 평범한 남편 김대중과 보냈던 시간이 이희호 여사에게는 퍽 좋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넌지시 물었다. 다시 ‘이희호 여사’로 태어날 수 있고, 다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청혼한다면 받아들일 것인가. 그러나 대답은 단호하기 그지없다.

“남편과의 결혼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남편과 함께 역사와 국민을 위해 살아 가겠습니다.”

 

임서연 기자 guiyoomi@yonsei.ac.kr
사진 유승오 기자 steven103@yonsei.ac.kr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