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군 진매마을에서 그의 삶의 흔적들을 좇다

 


“창우야, 다희야, 내일도 학교에 꼭 와. 새와 나무와 다람쥐와 떨어진 단풍잎이 까치랑 운동장에서 기다리니까, 꼭 와.”

일주일만 기다리면 만개한 벚꽃 잎이 연두빛 운동장을 휘날릴 김용택 시인의 학교는 매우 아름다웠다. 중학교 2학년 국어책에 나오는, ‘가짜학생’ 창우와 다희가 뛰어노는 곳. 아직 입학할 나이가 채 되지 않았는데도 수업에 나와 이것저것 질문하던 ‘공식 커플’ 창우와 다희는 이제 운동장에서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덕치초등학교에 도착하자 또 다른 꼬맹이들 네 명이 자전거를 축구 골대 옆에 대 놓고 놀고 있었다. ‘서울에서 왔대’라며 기자를 흘낏흘낏 쳐다보고 도망 다니는 아이들을 과자로 붙잡았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초등학교 4학년 남자아이에게 김용택 시인을 아냐는 질문을 던지자, “엄마 스승이 김용택 선생님인데 모를 리가 있냐”는 답변이 돌아왔다. 시인에 대해서 더 물으려 하자 “이상한 사람들일지도 몰라”라며 과자봉지만 들고 도망가 버렸다.


탁 트인 하늘, 그리고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덕치초등학교는 주말이라 문이 잠겨있었다. 창문으로 들여다본 1학년 교실 내부에는 넓은 교실에 선생님 책상 하나, 그리고 네 개의 책걸상이 교실 한 가운데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것이 전부였다. 도망가 버린 꼬맹이들이 “김용택 선생님에 대해서는 지존이에요”라고 추천해 준, 학교 옆집에 사는 지형이네 문을 두드렸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를 품에 안고 마루에서 이야기를 해 준 지형이는 “김용택 선생님이랑 강에도 나가보고, 운동장에서도 같이 놀면서 시를 배웠다”고 말했다. 이렇게 벚꽃 피는 계절에는 아이들끼리 사귀기고 꽃 아래서 데이트도 하지 않냐고 묻자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

‘섬진강 시인’이라 불리는 김용택 시인은 평생을 섬진강과 함께 산 사람이다. 그는 전라북도 임실군 진메마을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어머니가 쌀을 팔아 만들어준 2천원을 들고 친구를 따라 광주로 임용고시를 보러갔다. 여기서 합격해 선생님이 된 그는 모교인 덕치초등학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다가 지난 1982년 시집『섬진강』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다른 학교로 옮겨 다녀야 하는 교사의 특성 때문에 5년에 한 번씩 다른 학교에 가서 근무했다가 다시 덕치초등학교로 돌아오며, 평생을 이 학교의 선생님으로서 보냈다.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치며 시를 쓰고, 얼마 전에는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영화 『시』에 ‘김용탁 시인’으로 카메오 출연도 했다.

그는 스스로가 농민들 사이에서 살아온 만큼 민중의 애환을 자연스럽게 녹인 시들을 써 왔다. 학생들에게는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창우야 다희야, 내일도 학교에 오너라」,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박완서의 단편소설 「그 여자네 집」 에 나오는 시 「그 여자네 집」으로 친근한 시인이다.

앞산이 길어 긴 뫼, 진매마을

학교를 나와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작은 강, 섬진강을 따라 쭉 가면 그가 살던 진매마을이 나온다.

앞산이 길어서 동네 이름이 긴뫼라/사람들이 부르기 편하게 진매로 되었는데/일본놈들이 긴 장자에 뫼 산이라/장산으로 고쳐버렸더라 - 「섬진강 13」 중에서

이러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 이 동네는 역시 ‘장산마을’보단 ‘진매마을’이 더 어울리는 곳이었다. 시인이 사랑하던 돌다리가 아직도 정겹게 놓여있는 섬진강을 마주한 이 마을의 집들에선 아직도 굴뚝으로 구수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나오고 있었다.

마을의 중심에 있는 마을회관의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화투판을 벌이거나 아랫목에 누워있는 노인들이 있었다. 김용택 시인에 대해 묻자 “저기 누워있는 사람이 용택이 어미여”하며 누워있는 할머니를 깨웠다. “뭘 물어볼게 있다고”라며 기자를 이끌고 데려간 곳은 작은 시골집이었다. 농협 표시 아래 김용택이라는 이름 석 자가 박혀있는 문패가 달려있는 집은 낮은 담벼락 위로 강과 산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마당에는 작은 소나무, 단풍나무, 꽃나무들이 정갈하게 심어져 있었다.

 

시 이런 거 몰른당게

작지만 따뜻한, 시골 할머니 댁 같은 작은 방에 앉아 김용택 시인의 어머니와 이야기를 했다. 아들의 시에 대해 묻자 “시 이런 거 몰른당게. 글도 모르는데 시가 뭣이다냐”라며 손을 내젓는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선생님이 된 그 날에 대해서는 신나서 말했다.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아들이 차비로 마련해 준 2천원을 들고 나갔다가 선생님이 돼 온 것이다. 진매마을은 물론이고 주변 서너 개 마을을 둘러봐도 선생님이 된 사람이 처음이었기에, 그의 교사 임용은 엄청난 경사였다. “양복 한 벌 맞추지 않고, 매일 같은 작업복을 깨끗이 다려 입으며 1시간 거리의 학교를 걸어다녔다”는 김용택 시인. 그의 어린 학생들이 선생님을 보겠다고 잔뜩 몰려 와서, 그의 어머니는 왕성한 식욕을 가진 아이들 밥을 해 주느라 허리를 필 날이 없었다. “그때가 참 행복했다”고 회고하는 어머니의 말씀에 그 때의 추억을 참 아름답게 기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들이 자랑스럽지 않으시냐는 질문에 “시는 읽어본 적도 없는디, 자랑스러운건지 어쩐지 모르지”라며 웃으시는 어머니의 미소가 시에서 본 그대로라 정겹게 느껴졌다.

-차비나 혀라/-있어요 어머니/철 지난 옷 속에서/꼬깃꼬깃 몇푼 쥐여주는/소나무 껍질 같은 어머니 손길 - 「섬진강 17」 중에서

 

 

김용택 시인의 서재, 관란헌을 엿보다

작은 들과 작은 강과 마을이 / 겨울 달빛 속에 그만그만하게 / 가만히 있는 곳 / 사람들이 그렇게 거기 오래오래 / 논과 밭과 함께 / 가난하게 삽니다 - 「섬진강 15」 중에서

김용택 시인이 더하지도 않고 덜지도 않은, 강물같이 깨끗한 표현으로 묘사한 진매마을은 그가 그린 것처럼 정겨운 곳이었다. 창호지 문을 열면 이렇게 잔잔한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 그의 서재 관란헌은 2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었다. 삼면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이 빼곡히 차 있었고 , 낮은 책상이 앞에 놓인 서재의 문을 열면 앞마당이 훤히 보인다. 그는 그 문을 열고 자연과 섬진강 물줄기를 바라보며 글을 썼던 것이다.

그대 정들었으리/지는 해 바라보며/반짝이는 잔물결이 한없이 밀려와/그대 앞에 또 강 건너 물가에/깊이 깊이 잦아지니/그대, 그대 모르게/물 깊은 곳에 정들었으리 - 「섬진강 3」 중에서

노을에 섬진강 강물이 반짝거리는 모습을 보며 이 자리에 앉아 시를 썼을 시인의 삶이 부러웠다. 잔잔한 바람에 지난 겨울 못다 떨어진 단풍잎들이 살랑살랑 스치며 소리를 내고, 작은 소나무와 담 뒤로 보이는 섬진강 그리고 낮은 산이 인사하는 곳. ‘이런 곳이라면, 내 입에서도 시가 절로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시인이기에 이런 곳에서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겸허해졌다.

평생을 난 땅에서 자연과 함께 살며 이 땅의 심지 같은 삶을 산 시인 김용택. 섬진강 줄기를 따라 그의 삶을 엿본 감상은 그가 참 단단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어린 제자는 ‘혼낼 땐 무서운 선생님’이라고, 어머니께서는 ‘농촌에 살면서 옷에 흙도 안 묻히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말한 그. 순박한 농촌 총각 이미지지만, 속으로는 매우 강직하고 곧을 수 있었기에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자연을 사랑하고 농촌에 답이 있다는 신념을 지킬 수 있었으리라. 자신의 발원지이자 삶의 터전인 섬진강을 헤치려 하는 것들에 대한 적의도, 그 땅에 대한 엄청난 사랑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섬진강 1

 

김용택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이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으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김유진 기자 lcholic@yonsei.ac.kr
사진 박동규, 유승오 기자 steven103@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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