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이라는 민족 수난기에 드러난 애환, 그리고 승화

“끝내 그 1월 추위 속에서 선생님은 다시 못 올 세상으로 떠나셨다. (…) 선생님은 마침내 그 추운 겨울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그 추운 겨울에 떠나신 것이다”
『석양을 등지고 그림자를 밟다』중 후배 작가 구효서 씨의「지난겨울은 추웠네」

 

늘 함박꽃같은 미소를 지었기에 우리들의 마음속에 어머니 같은 존재로 남아 있는 고(故) 박완서 작가. 어머니를 잃은 심정처럼 따뜻하지 못했던 그해 겨울, 그녀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유년의 기억을 잇는 단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어지러웠던 일제강점기에 유년기를 보냈지만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만큼은 살아온 무게나 잔재를 털어버린 여유로움을 지닌다. 고인의 유년 기억들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다보니 어린 시절 박적골에서부터 일제강점기, 6.25 동란을 겪은 시간들을 거슬러 올라간다.

박완서는 어린 시절 한적한 시골에서 자연의 일부가 된 채 자랐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에는 마을 도처에 흐르는 실개천에서 물장구를 치다가도 군대처럼 몰려오는 소나기의 장막에 죽자꾸나 뛰기도 했으며 하늘을 향해 미친 듯이 환성을 지르며 비를 흠뻑 맞기도 했다. 더불어 유년기의 추억이 어린 여러 놀이터 중 가장 환상적인 놀이터는 뒷간이었는데 코가 막혀 냄새를 맡지 못하는 도깨비가 밤새도록 똥으로 조찰떡을 빚는다는 유쾌한 이야기도 내려온다. 이처럼 어린 박완서를 회상하는 필체는 유유히 날아다니는 나비처럼 가볍다.

그녀가 국민학생이었을 즈음에는 서울에서 통학길을 홀로 걸어야 하는 외로움을 시골 뒷동산에서 피어나던 영롱한 빛의 달개비꽃과 향기로운 아카시아꽃을 추억하며 달랬다. 한편 그녀는 기생들을 위해 하는 삯바느질을 하면서도 공부를 많이 해 신여성이 돼야 한다고 말씀하시던 어머니의 모순적 태도를 이해할 수 없기도 했다. 다만 남자, 여자구분 없이 배우고 당당히 살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생각은 훗날 그녀가 여성문제에 대한 시각을 갖는데 영향을 끼친다.

자유로운 날개짓 속의 날카로움

사뿐사뿐 그녀의 어린 시절을 되짚어 본 나비의 날개짓에도 예리함은 존재한다. 그녀가 숙명여고에 진학할 무렵, 운동장에서 아침조회를 할 때마다 황국신민맹세를 하고 군가 행진곡에 발을 맞춰 교실에 들어가곤 했다. 뿐만 아니라 창씨개명의 강제성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순둥이 같던 박적골 사람들도 두 집 빼고 모두 성을 갈고 만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는 6.25 전란을 겪은 서대문 네거리의 건물들을 괴기하고 흉물스런 폐허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매스 게임*의 아무런 의미없는 무용을 보며 허상뿐인 공산주의를 외면하기도 한다. 이처럼 박완서는 자신의 전쟁 체험을 바탕으로 분단의 비극을 집요하게 다루거나 전쟁의 비극성을 신랄한 시선으로 다루었다. 더불어 시민들이 당면한 굶주림의 공포와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을 현실적으로 드러냈다.

짓눌린 무게를 벗어난 가벼움

일제의 패색이 짙어진 강점기 말, 징용에 동원될까 노심초사하고 있는 그녀의 오빠와 정신대에 끌려가는 소녀들로 인해 흉흉해진 상황 속에서도 일상적 삶을 그린 내용이 많다. 그것은 그녀가 인간의 감정과 이면을 잘 파악하고 고통과 애환을 글로 표출하는 것에 굉장히 탁월한 작가였기 때문이다. 또한 6.25 전쟁 통에 친지들을 잃은 아픔을 갖고 있지만 박완서는 결코 무겁거나 침울하게 말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전쟁 중에 총상을 입은 오빠의 죽음을 묘사하는 부분에 있어서 총을 맞았던 그 순간부터 서서히 사라져 간 것이라 표현하고 있다. 이에 대해 윤덕진 교수(인예대·고전문학)는 “전쟁 중에 친지들을 잃는 등 비극적인 상황을 겪고 그것을 견뎌냈기에 타인을 바라보는 통찰력을 얻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오빠와 숙부의 죽음. 그녀의 일생에서 전쟁의 파편들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가시밭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삶에서의 아픔이 있었기에 그것을 절제하여 승화하고 소소한 삶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었다. 이렇듯 박완서가 말하는 가벼움은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내재돼 있었던 바람과도 같았다.

진솔한 문학 언어로 독자의 가슴을 파고들었던 고(故) 박완서 작가. 그녀의 첫 작품인 『나목』에 쓰인 ‘자유로움으로 날개를 접고 쉬고 있는 큰 나비’라는 표현처럼, 그녀도 따스함 속에서 피어나는 강렬함을 남긴 채 우리 곁을 떠나갔다. 하지만 그 추웠던 겨울을 작품 속에서만큼은 인간미 넘치는 삶의 향기로 나타냈기에… 그해 겨울은 따뜻했다.

*매스 게임: 집단으로 행하는 맨손체조 또는 체조연기. 일사불란한 동작의 획일성이 절대권력을 상징하기도 함.

정현정 기자 burning@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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