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반 위에 일기를 쓰는 남자, 이루마

피아노를 잘 모르는 사람도 “아, 이 노래 낯익은 곡인데”라며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이가 있다. 'Maybe', 'River flows in you', 'Kiss the rain' 등 특유의 은은하고 잔잔한 선율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며 감동을 선사하는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어느 가을날, KBS 로비에서 이루마와의 솔직하고 담백한 만남을 가져봤다.

 

장난감 같던 피아노, 그것으로 꿈을 ‘이룬’ 이루마

 

78년생 치곤 이름이 색다르다. 혹시 또 다른 본명이라도 있는 것일까. “부모님께서 ‘뜻을 이루다’라는 의미로 저희 3남매의 이름을 지어주셨어요. 저는 ‘이루마’이고 두 누나의 이름은 ‘이루다’, ‘이루지’에요”라며 이름에 얽힌 일화를 알려줬다. 이미 작곡가라는 ‘이룸’은 이뤄졌고, 이제는 피아니스트로까지 인정받고 있는 그는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누나가 취미로 피아노를 쳤기 때문에 5살부터 건반을 만진 그에게 피아노는 몰래 유치원도 가지 않고 하루 종일 칠 정도로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장난감이었다. 어린 시절 또 다른 꿈은 없었는지 묻자 “대통령만은 되지 말자라는 의지만큼은 확실히 가지고 있었죠”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변함없이 연주하고 있었을 소년 이루마의 천진한 웃음이 피어나는 듯했다.

 

음악은 나와의 대화, 그리고 일기

 

“절대음감이요? 저는 그런 음악적 성향보다는 귀로 잘 듣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을 뿐입니다.” 혹시 절대음감을 갖고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루마는 손사래를 치며 자신은 단지 ‘귀로 잘 듣는다’고 말할 뿐이다. 귀로 잘 듣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격정적인 음악보다는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연주해요. 집에서도 버릇처럼 피아노 앞에 앉아서 즉흥적으로 연주를 하죠. 귀로 잘 듣는 것이란 피아노를 때리기보다는 ‘만지면서’ 대화하는 듯한 자세의 연주일 거예요.”

이루마에게 피아노는 소소한 일기와 같다. “그날 경험이나 기분에 따라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작곡을 많이 했어요.” 글이 아닌 음악으로 일기를 승화시키는 풍부한 감수성은 그의 작곡 동기가 된다. “피아노 앞에 앉아있을 때, 다른 곡을 연주할 때, 때로는 자다가 때로는 걷다가 제 어떤 감정에 따라서 심상이 떠오르면 작곡을 하게 되죠.” 잠시 회상하는 표정을 짓더니 'Kiss the Rain'에 담긴 경험을 이야기했다. 영국에서 대학 생활을 하고 있었던 어느 날, 그는 워털루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영국은 한국과 달리 날씨가 우중충한 날이 많고 하루에도 여러 번씩 가랑비가 내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산을 쓰지 않고 비를 맞는데 별로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그날도 그렇게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고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데 갑자기 악상이 떠올라 이 노래를 짓게 됐다고. 그래서 노래의 이름을 한글로 그냥 ‘비를 맞다’로 썼다고 말한다. 그리고 비밀스레 덧붙이는 말 한 마디. “단지 내 악상을 수정한 것이 있다면 조금 더 오묘하고 듣기 편하도록 사장조에서 내림 가장조로 조바꿈을 한 것밖에 없네요.”

 

나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피아노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들을 수 있는 불평으로 어떤 것을 꼽을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악보를 보면서 따라가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 한다. 이에 대해 그는 악보를 그대로 따라 치는 것보다는 ‘자신에게 충실하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과연 모든 연주자들이 그 악보대로 피아노를 쳤을까라고 반문했다. “악보란 작곡가가 작곡한 노래를 가장 보편화해놓은 형식에 지나지 않아요.”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곡을 칠 때는 악보와 똑같이 연주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각자의 감정에 따라서, 느낌에 따라서 ‘자기화’하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인간적이고 살아있는 새로운 음악이 탄생할 수 있거든요” 악보를 보고 그대로 치는 것이 싫어서 클래식을 그만뒀다는 이루마. 솔직함에서 우러나오는 재즈의 자유분방함이 좋다는 그에게서 그의 음악이 지닌 ‘새로운 끌림’의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한창 인터뷰를 진행하다가 불현듯 두 손에 시선이 갔다. 피아노를 치는 사람 손치고는 왜소한 크기였다. 그는 작은 손 때문에 남들과 다른 특별한 신조를 갖게 됐다. 나의 한계를 알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루마를 피아니스트로 알고 있지만 작은 손을 가진 그에게 빠르고 격정적인 음악을 친다는 것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차라리 피아니스트보다는 작곡가로서의 길을 가는 것이 제게 더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됐죠”라고 말하는 그는 “제가 작곡한 음악을 치니까 더 편합니다”라며 웃음을 터뜨린다. 새로운 길을 만들려고 노력했을 때 한계를 알아보고 다른 길을 찾아보는 방법을 추구하는 것이다. “안되면 되게 하라 식의 불도저식 방법이나 섣불리 시도해서 번번이 실패한 후 ‘나는 안돼’라며 패배주의에 빠지는 것도 안된다고 생각해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좀 더 맞는 방법을 탐색하는 거죠.”

 

가족, 음악, 그리고 세미클래식을 추구하는 남자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은 하나가 아닌 둘”이라고 말한다.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는 두 가지는 바로 가족과 음악이다. 세상 누구보다도 아내와 딸 로운이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는 “딸이 커서 제 이름이 알려져도 창피하지 않은 그런 아빠가 되고 싶어요”라는 소망을 전했다. 세상에 이로운 사람이 되라고 이름 지어준 딸 로운이는 그에게 음악에 대한 새로운 욕구를 다시 일으켰다. “어쩌면 이전의 음악은 저를 위해서 만든 곡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젠 사랑하는 딸과 아내,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멋지고 사랑받는 음악을 작곡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기왕이면 몇 백 년 뒤에도 제 음악이 사람들 사이에 들려지고 음악사에서 저의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나올 정도로 말이죠” 사랑하는 가족을 위한 작곡과 연주를 하게 되면서 새롭게 생긴 소망을 위해, 그는 오늘도 음악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연주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루마를 대할 때 흔히 한국 뉴에이지 작곡가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하지만 이루마는 자신을 ‘세미클래식을 추구하는 남자’라고 소개한다. “세미클래식은 클래식과 재즈 사이에 있는 장르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은 포임 뮤직(Poem music)을 추구하고 있죠. 저는 장르를 떠나서 좋아하는 음악을 할 뿐이예요.” 이루마가 원하는 것은 특정한 타이틀에서 탈피해 구속받지 않는 작곡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고 싶은 음악을 찾기 위해 다른 음악에도 관심을 갖고 듣는다. 그런 방식이 음악을 살게 할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현재 드라마음악을 창작하는데 열정을 기울이고 있다. 그 밖에도 연극음악이나 가요창작, 나아가 선율을 벗어나 작사의 영역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결국 그에게 있어서 음악은 아무리 투자해도 부족한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은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이런 음악의 길을 선택했기에, 피아노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가지는 저에 대한 기대가 존재하기 때문에 저는 행복합니다.”

글 박동규 기자 ddonggu777@yonsei.ac.kr

사진 김민경 기자 penny9109@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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