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웅현 ECD에게서 인문학적 창의력을 배우다

 

TV를 켰을 때 홍수처럼 쏟아지는 광고들 중, 우리 기억 속에서 살아남는 것은 몇 개나 될까? 5년이 지난 후에도 기억되는 광고들은 많지 않다. 그런데 광고대행사 TBWA의 박웅현 광고제작 총괄 책임자(Executive Creative Director, ECD)가 만든 광고들을 보자. SKT의 ‘현대생활백서’, KTF의 ‘사람을 향합니다’, ‘넥타이와 청바지는 평등하다’, e-편한세상의 ‘진심이 짓는다’ 등. 대부분 간단한 카피만 봐도 어떤 광고였는지가 떠오를 것이다. 박 웅현 ECD, 그는 어떤 사람이길래 이 광고들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일까?

그 시작은 미미했으나

“처음에는 이 길이 내 길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었죠.” 광고계의 첫인상에 대해 묻자 언제나 광고계의 총아였을 것만 같던 박 ECD에게서 의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회사에 들어간 후 그는 ‘이런 곳인 줄 몰랐다’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고려대 재학 당시 신문사 편집장까지 지낸 박 ECD는 사변적인 성향에 논쟁을 좋아하고 모든 것을 머릿속에서 뽑아내려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발을 내딛은 광고계는 책상에 앉아 머리로만 생각하는 아이디어보다 패션잡지를 툭 찢어서 가져오는 감각적인 아이디어가 각광을 받는 곳이었고, 박 ECD는 그런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게 3년을 고생한 후, 그는 ‘내 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것 또한 광고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래서 눌러 앉았죠.” 그는 광고를 ‘예술의 탈을 쓴 과학’이라고 표현했다. 표면적으로는 끼 있고 감각이 있으면 되는 예술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마케팅이라는 치밀한 과학이 숨어있고 이는 논리성과 분석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인문학적이어야 창의적이다

그의 저서인 『인문학으로 광고하다』의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 그는 광고를 만드는 창의력이 인문학에서 나온다고 역설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인문학은 학문을 뜻하는 좁은 의미가 아니다. “좁은 의미에서 인문학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오해를 많이 하고 인문학적 창의력이 뭐냐고 물어봅니다. 그런데 저는 반대로 인문학적이지 않으면 어떻게 창의적일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우리 삶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인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광고가 기능을 하려면 사람 사는 모습이 제대로 들어가야 하는데 광고는 15초밖에 되지 않잖아요. 24시간인 우리의 삶을 담아내려면 생활의 단면을 잘 포착해서 광고에 표현해야 합니다. 그 단면을 잘 잡아내는 사람이 창의적인 사람인거죠.”

그렇다면 이 창의력을 잘 발휘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그는 ‘세심하게 보는 것’에서 아이디어가 나온다고 했다. “아이디어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나올 수가 없어요. 'We don't create. We copy and make it better'라는 말이 있는데 이와 같다고 생각해요. 발명이 아니라 발견인겁니다.” 박 ECD는 이렇게 세심하게 보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데 여기서 다시 인문학이 등장한다. 보통 말하는 인문학적 소양을 쌓는 것이 그 훈련이라는 것이다. “알베르 까뮈의 작품을 읽고 1천명 중 990명이 재미없다고 생각하고 10명이 재밌다고 생각한다면, 그 10명이 중요한 겁니다. 훈련이 돼있는 10명이 까뮈의 한 줄에 감춰진 이면을 볼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생각과 감상의 지평이 넓어지는 거예요. 그 넓어진 지평 아래서 창의성이 나오는 것이고요.”

광고의 설계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박 ECD는 이 창의력을 바탕으로 광고의 설계과정을 모두 총괄한다. 음악, 디자인 등을 직접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최종적으로 그가 모두 확인하고 책임지는 것들이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는 안목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예를 들어 광고에 쓰이는 음악을 만든다고 하면, ‘내가 얼마나 들을 수 있느냐’가 ‘전문가에게 얼마만큼 주문할 수 있느냐’의 한계치를 결정하는 거죠.”

여기서 박 ECD의 창작에 대한 스트레스는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진다. “전 없어요.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는 자신의 생활을 ‘셔터놀이’라고 말했다. 퇴근하면 회사의 셔터를 닫고 집에서 즐겁게 놀고, 또 출근하면 일하는 데 집중한다. “광고계는 완성물이 시간에 비례하는 곳이 아니예요.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속에 들어왔다’라는 카피를 몇 시간 동안 썼다고 생각하세요? ‘그녀의’, 다섯 시간 있다가 ‘자전거가’, 이렇게 하지 않잖아요. 10시간 야근한 사람이 내놓는 카피보다 퇴근한 후 정종 한 잔 마시면서 10분 만에 떠오른 카피가 좋을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밤새 야근하고 아침에 정신이 없다는 사람 별로 안 좋아해요. 자라니까, 가서?”

박 ECD의 진심이 말한다

대학시절의 박 ECD는 소속돼있던 사과대 수업보다 인문대 수업을 더 많이 들었다. 신문방송학과였던 그가 들었던 신문론, 신문 제작 방법론 등의 수업은 지금의 박 ECD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았다. 그는 지금 자신의 자산이 되는 것은 대학 시절 본 영화, 들은 음악, 읽은 책들, 친구들과의 대화라고 말했다. 박 ECD는 대학 시절에도 이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공인 회계사를 준비하던 군대 선임이 ‘너는 너무 시간을 낭비한다’고 핀잔을 줬을 때 그의 대답은 ‘내 공부는 저 길거리에 있다’였다. “10년, 20년 후에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본질적인 것들입니다. 저는 살아봤으니까 그게 보여요. 물론 대학교 4학년 취업준비생들에게는 사치스러운 소리로 들리겠지만 나는 계속 이 얘기를 할 거예요. 진심이 짓는다? 저의 ‘진심이 말한다’입니다.”

‘본질’이라는 말이 모호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박 ECD는 본질을 파악하려면 ‘이것이 20년 후, 50년 후에도 살아남을지를 생각해보라’고 조언한다. 지금 우리가 소비하고 있는 대중문화가 과연 미래에도 살아남을지를 살펴보면 그것이 본질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몇 십년, 몇 백년을 살아남은 것이 고전이에요. 근데 이 고전들이 요즘에는 소비적인 대중문화에 가리잖아요. 그게 아닌데.” 그래서 그는 뭔가 잡히지 않을 때는 고전을 본다. 혹독한 시간의 시련을 훌륭하게 견뎌낸 것들이기 때문에 보고 있으면 안심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본질이다.

입사 시험? 얼마든지 공개하죠

박 ECD가 신입 사원을 뽑는 시험이 이러한 그의 생각을 반영한다. 시험문제는 얼마든지 공개할 수 있다며 그가 말해준 시험은 총 3단계다. 1단계에서는 분야를 막론한 단어를 스무 개 제시하고 아는 바를 한 줄, 느낀 바를 두 줄로 쓰게 한다. 2단계에서는 시 구절 서너 개에 대한 감상을 묻고, 3단계에서는 ‘너의 친구가 앞을 못 보는 사람이라고 했을 때, 그에게 한강을 설명해보라’와 같은 설득력과 표현력을 엿볼 수 있는 질문을 한다. “제가 인문학을 학문을 넘어 우리의 삶 전체로 본다고 했죠? 그렇기 때문에 1단계에서 패션 디자이너, 가수, 파스타 이름 같은 단어도 제시합니다. 처음 제가 고생했듯이 광고계에서는 감각적인 부분이 매우 중요하고 그건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게 아니죠. 세 단계의 시험을 통해서 이 사람이 뭘 보고 뭘 느끼고 살아왔는지를 대강 파악할 수 있습니다.”

박 ECD는 이 세 단계의 시험과 자기소개서, 그리고 한 시간에 걸친 1대1 면접을 통해 매년 신입 카피라이터 한 명을 뽑는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과정을 누가 통과할까 싶지만 오히려 아깝게 뽑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편이란다. 이 과정에서 그가 원하는 ‘느낄 수 있는 훈련이 충분히 된’ 사람들이 선발된다. 그렇게 선발한 신입 사원들은 박 ECD가 존경하는 후배들이다. “광고에 대한 이론, 마케팅 이론들, 다 몰라도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건 1년 안에 제가 다 가르칠 수 있는 것들이고 중요한 건 생각의 기초체력이죠.” 박 ECD는 이런 사실을 알려주고 싶기 때문에 시험문제를 얼마든지 공개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익살스럽게 덧붙였다. “이런 식이니까 문제를 공개하는 건 제 시험을 준비하는 데는 별로 소용없죠?”

“카르페 디엠”

대학생 때 꼭 해봐야 하는 것을 물어봤을 때 박 ECD는 이렇게 답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인터뷰 중 했던 말처럼,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하고 있는 인터뷰’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인터뷰를 하고 있는 기자’였다. “실존주의, 선가의 화두, 'seize the moment'. 현재가 중요하다, 이것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다른 방법으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는 이것을 개에 비유했다.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지난 일에 대해 후회하는 일이 개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개처럼 사세요. 개들은 밥 먹을 때 ‘아, 내가 꼬리를 쳐야되는데’, ‘아까 주인에게 짖은 것이 마음에 걸리네’,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아요. 개들이 뭔가 할 때는 그것에만 집중하는 것처럼,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이재은 기자 jenjenna@yonsei.ac.kr
사진 김민경 기자 penny9109@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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