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10주기 맞은 고(故) 황순원 작가의 문학관을 찾아가다

“어서들 집으루 가거라. 소나기가 올라.”
참 먹장구름 한 장이 머리 위에 와 있다. 갑자기 사면이 소란스러워진 것 같다. 바람이 우수수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삽시간에 주위가 보랏빛으로 변했다.
산을 내려오는데 떡갈나무 잎에서 빗방울 듣는 소리가 난다. 굵은 빗방울이었다. 목덜미가 선뜻선뜻했다. 그러자 대번에 눈앞을 가로막는 빗줄기.

올해로 작고 10주기인 고 황순원 작가의 소설 「소나기」의 한 장면이다. 소나기마을로 향하던 날도 마치 소설 속 그날처럼 오전부터 어두침침하더니 이윽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양평행 지하철과 버스를 거쳐 남한강을 옆에 끼고 굽이굽이 길을 꺾기를 여러 번, 보슬보슬 내리던 비는 소나기마을에 가까워지면서 점점 빗줄기가 굵어지더니 도착했을 즈음에는 진정한 ‘소나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양평 소나기마을은 국내 최대 규모의 문학관으로 황순원 작가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유명문인이 작고할 경우 보통 그 문인의 고향에 문학관을 건립하지만 황순원 작가의 고향은 평안남도 대동군인 탓에 어떤 지자체에서도 문학관을 세우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후배문인들이 군과 협의한 끝에 지난 2009년 6월, 남한 땅 양평군에 황순원 작가의 문학관을 세웠다. 왜 양평이어야 했을까. 그 답은 이 한 문장에 담겨있다. ‘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간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모티브를 따 황순원 작가의 단편 중 백미라 할 수 있는「소나기」를, ‘소나기마을’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 양평군에 재현했다.

소설 속으로의 여행

양평군 중에서도 버스가 닿지 않는 구석, 택시를 타더라도 풀숲이 우거진 길을 한참 지나와야 하는 소나기마을. 비가 억세게 쏟아지던 오후에 찾아갔음에도 마을 안은 황순원 작가와 그의 문학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황순원 작가의 제자들 중 한 사람으로 소나기마을 촌장인 김용성 작가도 문학관 앞에서 먼 길을 찾아온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김용성 촌장을 따라 소나기마을에 들어서자 빗물에 촉촉이 젖은 소나기광장과 소나기문학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축구장만한 크기의 평지가 잔디로 덮인 소나기광장에는 원두막과 징검다리, 소녀가 비를 피할 장소로 사용했던 수수단이 마치 실제 소설의 배경처럼 만들어져있다. 광장에서 눈을 조금 돌리면 기묘한 형태를 한 소나기문학관의 지붕이 눈에 띈다. 지붕은 소설 「소나기」에서 소년과 소녀가 소나기를 피했던 수숫단 모양을 본뜬 원뿔형을 하고 있다.

“도라지꽃이 이렇게 예쁜 줄은 몰랐네. 난 보랏빛이 좋아!……근데 이 양산같이 생긴 노란 꽃이 뭐지?” /”타리꽃”

소나기마을 입구에서 전체적인 풍경을 둘러보다가 화단을 발견했다.「소나기」의 한 대목에 나오는 꽃이 있을까 싶어 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가 와 한 풀 죽은 모습이지만 화단에는 마타리꽃과 도라지꽃이 피어있었다. 중학교 교과서에는 ‘보랏빛’이라는 단어가 소녀의 죽음을 암시하는 복선으로 나온다. 하지만 김 촌장은 이를 “작가가 의도한 복선은 아니다”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가을이 배경이라 단지 가을에 많이 핀 들꽃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소나기가 여름에 많이 내린다는 이유로 소설의 배경이 가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러나 소설 속 소나기가 가을 소나기라는 것은 소설 전반에서 묘사되는 가을 분위기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김 촌장의 설명을 들으며 「소나기」의 여주인공이 된 양 코를 가져다대자 된장 냄새가 나 어리둥절했다. 어떻게 맡아도 토속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향기다. 어린 소년, 소녀가 이런 향기를 맡으며 풋사랑을 했을 거라 생각하니 그야말로 ‘풋풋’ 자체다.

전쟁의 슬픔을 어루만지다

하지만 「소나기」의 창작배경은 이런 풋풋함과는 거리가 멀다. 김 촌장은 “「소나기」는 지난 1953년 6·25전쟁으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고통을 겪어야 했던 때에 쓰였다”며 “한 잡지사에서 황순원 작가께 이 당시 어린이들의 슬픔을 보듬을 수 있는 아름다운 소설을 써달라고 청탁해 탄생한 것”이라고 말했다. 즉 소나기는 소녀의 죽음으로 슬프게 끝맺어지기는 하나 현실의 비극적 상황 속 아이들 마음을 매만져 주기 위해 쓰인 소설이라는 것이다.

비안개 속에 원두막이 보였다. 그리로 가 비를 그을 수밖에.

창작배경을 듣고 느낀 씁쓸함을 뒤로한 채 소나기광장으로 걸어갔다. 소년, 소녀가 비를 피했던 수수단과 원두막, 징검다리를 보니 마치 소설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수수단 위에 설치된 스프링클러에서는 하루 3번 인공 소나기가 하늘로 쏘아 올려 진다. 굉음과 함께 뿜어져 나오는 굵은 물줄기 속을 지나가노라면 얼른 수수단 밑이나 원두막 안으로 달아나고 싶어진다. 소년, 소녀가 돼 비에 젖은 생쥐 꼴을 한 채 징검다리를 건너 옆의 원두막으로 대피했다가, 수수단 속에도 들어가 보기를 여러 번. 한 곳에만 머무르긴 아깝다는 생각에 얼른 소나기문학관으로 향했다.

오감으로 맞는 소나기

소나기문학관은 황순원 작가의 작품과 실제 사용하던 유품을 전시한 전시실과 애니메이션 영상실, 소나기마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옥외쉼터와 문학카페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눈여겨 봐야할 것은 애니메이션 영상실이다. 문을 열면 소설 속에서 초등학교 5학년으로 설정됐던 소년·소녀의 교실 모습이 아기자기하게 재현돼 있다. 걸상에 앉아있노라면 곧 불이 꺼지고 애니메이션이 재생된다. 애니메이션은 소녀의 죽음으로 끝났던 원작에 판타지적인 요소를 가미한 후일담이다. 소녀가 하늘나라에서 학을 타고 내려와 소년과 놀다간다는 내용으로, 더 이상 슬프지 않게 된 소년이 미소 짓는 것으로 애니메이션은 끝맺어 진다. 재미있는 점은 상영 중 바람이 불면 실제로 영상실 안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천둥이 치면 영상실 안의 전등이 푸른빛으로 번쩍이고, 비가 내리면 영상실의 천장에서 약한 비가 흩뿌려진다는 것이다. 황순원 문학을 과거에 가두지 않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제자들의 노력이 애니메이션과 상영관에서 그대로 묻어난다. 상영관 뿐 아니라 전시실과 문학카페에서도 각종 영상과 음향 자료, e-book 등 소설을 현대적 기술과 결합시켜 오감으로 황순원 문학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전시실에는 황순원 작가가 실제 거주하던 방이 재현돼 있다. 다른 한 켠에는 그의 필적이 그대로 담긴 원고지 등이 전시돼 있어 작가의 인간적 모습을 볼 수 있게 한다. 김 촌장은 “예전에 한 제자가 황순원 작가에게 그의 삶에 대해 묻자 선생님은 ‘작품 속에 다 있다’고 말하곤 답해주지 않았다”며 “끊임없는 퇴고를 거쳐 수식어가 많지 않은 선생님의 작품에는 그의 맑고 정결한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다”고 말했다.

잃어버리지 않은 ‘순수’가 내리다

문학관 밖으로 나오자 비가 어느 정도 갰다. 문학관 옆에 있는 황순원 묘역에서 조용히 묵념하고 옆의 테마 숲으로 향했다. 입구에는 황순원 작가의 소설을 분석한 글이 적혀있어 그것을 떠올리며 숲을 걸으면 마치 문학 작품 속을 산책하는 듯한 느낌이다. 김 촌장은 “「소나기」소설 속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라고 말했다. 어른들은 소나기마을에서 「소나기」 소설처럼 아이의 마음으로 세상에 찌든 마음과 신체를 깨끗이 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된다는 것이다.

김 촌장의 말처럼 소나기마을에 머무는 동안 잠시 세상 밖의 일을 잊었다. 빗물로 촉촉이 젖은, 마치 숨 쉬는 듯한 숲 속의 땅을 조심스레 밟아 걸어 나갔다. 끊임없이 걸어 긴 계단을 내려가자 꽤 큰 개울이 보인다. 징검다리도 있다. 마치 소년과 소녀가 투닥였던 징검다리 같다.

개울가에 다다르기 전에 가을하늘은 언제 그랬는가 싶게 구름 한 점 없이 쪽빛으로 개어 있었다.

그리고 2010년, 황순원 작가의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한 소나기마을의 어느 개울가에서도 소설 속 그날처럼 비가 개고 있었다.

남혜윤 기자 elly@yonsei.ac.kr
사진 박동규 기자 ddonggu777@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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