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미국 국무장관, 오늘의 서진규씨를 만나다

 

허황된 소리처럼 들릴지 모른다. 한국인 출신으로 미국 국무장관을 하겠다는 배짱 좋은 사람이 또 있을까?“당연히 될 수 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말한다. 그들이 생각할 때 “과거 가발공장 여공이 오늘의 서진규가 된 것이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뭐라? 궁금해진다. 이 아줌마,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배짱 좋은 ‘초딩’, 하버드대 박사가 되다.

지금의 그를 만든 건 팔할이 성격이었다. 여성들에게 모든 기회가 닫혀있던 그 때 그 시절부터 ‘박사’를 꿈꿨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본인 이름도 제대로 쓰지 못하던 꼬마아이가 꾼 꿈이었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현실에서 믿을 것은 나 자신뿐이었기 때문에 나를 다잡기 위한 다짐 같은 거였어요.” 자기 자신을 세뇌시켜가면서까지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성격이 그를 당시 누구도 쉽게 엄두 내지 못했던 미국이라는 나라에 당당히 도전장을 내밀게 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가발공장 여공’이라는 직업 이상을 가질 수 없게 되자 그는 주저하지 않고 보다 차라리 큰 나라인 미국에서 식모 가 되기로 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미국에서 생활을 시작한 그는 미군에 도전했고 여성 최초로 일본에서 동아시아 지역전문가를 거치는 등 군에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던 중에도 못 다한 공부를 계속해 하버드대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그러나 이런 성공 후에도 미군 내에서 보장된 길을 포기하고 하버드대 박사과정으로 가는 문을 두드렸다. 두드린 문은 각고의 노력 끝에 열렸다.

도전은 계속된다. 쭈욱~

서진규에게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열심히 살았고, 충분히 인정받고 있으니 이젠 쉬고 싶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 어린 기자가 뭘 모른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휴식이란 건 거창한 게 아니에요. 바쁘게 살다가 연속극을 보는 그 순간에 행복을 느낄 수도 있는 거거든요. 치열함 속에서 여유를 즐기는 게 정말 휴식이에요.”


그래서 그는 아직도 치열하게 살고 있나보다. 이미 한국에서 책을 세 권이나 펴냈고, 올해 중으로 미국에서도 출판될 예정이다. 또, 매주 미국 라디오방송을 진행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그를 원하는 곳 어디에서든 강연을 진행해 다른 사람들에게 꿈을 선사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은데, 그 길을 강연에서 찾은 거죠.” 그는 강연을 할 때면 물 만난 고기처럼 너무도 신이 난다고 말했다. 이런 마음은 청강생에도 전해지고 있다. 꽤 성공한 제약회사의 사장도 강연을 들은 후 “내 인생이 성공적이라고 생각했고 이대로 안주하려고 했는데, 다시 새 인생을 살 수 있을 것 같다”며 손을 꽉 붙잡았다고 했다. 서진규로 인해 사람들이 달라지고, 그 사람들은 다시 서진규를 가슴 뛰게 했다.

내 인생의 황금기는 오지 않았어.

“미 국무부장관이죠.” 다음 행보에 대해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이다. “하버드도 해 보니까 별 거 아니더라고요. 국무장관이라고 못 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막연한 꿈이 아니었다. 그는 구체적으로 2017년에 국무장관이 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는 여성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누가 대통령이 되든 여성 장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그녀는 미국의 수많은 소수민족들을 어루만질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게다가 저는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영웅이기 때문에 장관이 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덧붙여 그는 본인의 “이혼 전력 역시 미국사회의 소수자들을 보듬을 수 있는 조건이 된다”고 말했다. 남들에게는 숨기고 싶은 일들도 그에게는 ‘희망의 증거’인 셈이다. 또한 서진규씨는 군대에서 많은 생활을 보냈고, 기여한 바가 크다. 지역전문가로서 활동하면서 나라 간 문화 차이를 고려해 5년 동안 풀리지 못했던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가 꿈꾸는 미국 국무장관은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닌 전략적 계산 하에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당신의 사랑도 분명히 식을 것이다”

‘직업적 성공만이 성공이 아니잖아?’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가정을 지키는 것 역시 성공의 척도 중 하나라고 본다면 이 측면에서 그는 실패한 인생을 살았다. 일생동안 두 번의 ‘진짜 사랑’을 경험했지만 그 사랑은 배신과 폭력으로 찢어졌기 때문이다. 그의 눈을 가렸던 ‘콩깍지’는 그의 객관적인 판단 능력을 흐렸고,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가졌던 남편은 군대에서 승승장구하는 아내를 ‘길들이기 위해’ 손을 들었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쓰린 이야기를 본인의 입으로 직접 하면서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한 번 사는 인생에서 뜨겁게 사랑하는 것은 분명히 중요하죠. 한 번도 하기 힘든 진짜 사랑을 전 두 번이나 했잖아요. 그런 면에서 전 행운아였다고 볼 수 있어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랑을 경험한 것 자체가 중요한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 “어떤 사랑이든, 당신의 사랑도 결국엔 식을 거예요.” 콩깍지가 씌면 주체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사귀고, 가능하다면 동거를 하고 섹스도 해보라는 그의 조언엔 직업인으로서가 아닌 인생 선배로서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평생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자신에게 당당했던 그라고 세상과 타협하고 싶었던 적이 없었을까. 차별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미국 내에서도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군대 내에서 여성의 나체사진을 걸어놓고, 스트립쇼가 벌어지는 술집에 가는 등 성희롱도 많았다. 서진규씨는 이런 것들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았다. 불합리한 것들에 사사건건 맞서는 것보다 큰 차별을 바꾸는 데에 주력했다. 특히 미국 군대 내의 차별을 없애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일본에서 동아시아 지역전문가를 뽑을 때, 그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낙방하자 그 관행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등 남성이 중심이 되는 군대에서 ‘여성도 똑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던 것이다. “이미 한국에서 숱하게 겪었던 경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죠. 어떻게 보면 그렇게 미워했던 한국 사회가 나를 미국에서 성공하게 해준 은인인 셈이죠.”
서진규씨도 피해갈 수 없었던 건강 문제와 갱년기의 우울증이 발목을 잡기도 했다. 그 때 그를 다시 일어나게 했던 것은 자신을 보고 희망을 얻은 사람들이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한국의 가정주부가 유명한 피디가 됐다는데 내가 포기하면, 무슨 낯짝으로 얼굴을 들겠어.”


처음 만난 기자를 딸처럼 대해주던 그는 우리네 친근한 ‘옆집 아줌마’와 닮아있었다. 그래서 그는 더 심금을 울리는 희망 그 자체가 될 수 있었나보다. 한 마디를 남기고 다음 일정을 위해 서진규 박사는 바삐 떠났다.
“인생은 한 번 뿐이야. 큰 꿈을 꿔. 크게 이룰 거야.”


김정현 기자 iruntoyou@yonsei.ac.kr
사진 김민경 기자 penny9109@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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