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서 우연성(random)찾기

악보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두말할 것 없이 오선과 음표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존 케이지의 「4분 33초」 악보에는 제목과 작곡자, 그리고 음표 대신 ‘침묵’만 3번 쓰여 있다. 연주자가 침묵하는 동안 우연히 만들어지는 소음들이 바로 음악이 되는 것이다.

우연성의 미학

「4분 33초」와 같이 예술 작품이 ‘랜덤’하게, 즉 우연성에 의해 탄생하는 것은 현대 예술계의 특징 중 하나다. 그러나 예술에 기본적으로 우연성이 내재돼 있기 때문에 우연성 자체를 하나의 사조라고 정의하기는 어렵다. 우리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강의하는 사학과 강홍구 강사는 “인간이 물질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물질을 표현의 매개로 삼는 예술에는 필연적으로 우연성이 있다”고 예술과 우연성의 관계를 설명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동양화의 먹(墨)이다. 먹은 농담과 번짐을 제어하기 어려워 근본적으로 우연성과 순간성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의도한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반대로 의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얻게 된다.

이렇게 예술에 있어서 우연성은 불가분의 요소지만 특별히 우연성을 주요 기지로 내세운 예술가들이 있었다. 앞서 언급한 작곡가 존 케이지와 그의 동조자들은 ‘우연성의 음악’을 제창하고, 무대에서 돌발 행동을 하거나 악보에 정확한 음표와 지시를 기록하지 않는 등의 시도를 했다. 또한 미술계에서는 1910년대부터 초현실주의자들이 우연성을 이용한 기법을 창시했다. 그들의 기법에는 무의식의 상태에서 예기치 못한 미를 추구하는 자동기술법(automatisme)과 물과 기름을 섞어 우연의 효과를 얻는 마블링, 한 표면의 무늬를 대칭적으로 찍는 데칼코마니 등이 있다. 강 강사는 “초현실주의자들은 인간이 의식적으로 사고를 억압한다고 생각해 의식을 제거하려고 노력했다”며 “당시 예술이 부르주아의 노리개로 전락했다고 여겨 교육이 필요하지 않은, 의도되지 않은 예술을 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무의식의 표출로 우연성을 성립시켰던 예전 사조와 달리 현대 미술에서는 관객과의 쌍방향성을 강조한다.  그 대표적인 움직임이 바로 ‘해프닝 예술’이다. 해프닝 예술로 포괄되는 행위예술, 바디아트, 비디오아트 등은 우연히 생긴 일이나 극히 일상적인 것을 ‘해프닝’이라는 하나의 행위로 표현한다. 해프닝 예술에서 관객들은 작품을 관람하는 수용자에서 벗어나 작품의 완성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이렇게 관객이 작품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작가가 통제할 수 없는 ‘우연성’이 나타나게 된다. 비디오아트의 거장으로 알려진 백남준씨의 초기 작품 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작품 「자석 TV」는 관객이 직접 비디오에 자석을 접촉시켜 이미지를 무작위로 변하게 하는데, 이 과정은 관객을 자극하는 하나의 해프닝이 된다. 이에 대해 강 강사는 “현대 예술가들은 행위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완성작보다는 행위 자체와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중시한다”며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해프닝을 일으킨다기보다는 그 해프닝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라고 해프닝 예술을 설명했다.

예술 밖의 예술

일반적으로 대중이 ‘순수 예술’로 여기는 분야 밖에서도 우연성의 미학은 적용되고 있다. 패션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은 지난 1999년 그의 봄여름 컬렉션에서 모델의 옷에 로봇으로 페인트를 분사했다. 즉석에서 무작위로 무늬를 그리고 옷을 완성해 우연성을 강조한 퍼포먼스였다. 디자인에서 봉제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계획 하에 제작되는 ‘옷’에 우연성을 적용한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지난 2003년부터 전세계적으로 유행한 플래시몹*도 우연성을 반영하는 일종의 행위예술이다. 플래시몹은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약속을 정하고 만나 특정한 행위를 한 후 바로 흩어지는 퍼포먼스다. 미리 맞춰진 약속에 의한 행위지만 철저하게 계획되지 않은 만큼 우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장소의 상황, 참여자의 수, 관객의 반응 등의 변수가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명동에서 플래시몹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는 중앙대 이선희(화학신소재공학부·08)씨는 “플래시몹에 앞서,  참가자의 등장 계획을 짜놨었는데 시간을 조절하는 게 쉽지 않았다”며 우연히 일어난 돌발 상황을 회상했다. 일부에서는 플래시몹을 단순한 놀이 문화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플래시몹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해프닝 예술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해프닝 예술처럼 플래시몹도 일시적인 만남과 불확정적인 행위 자체에서 예술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작가가 의도한 바가 중요한 예술에서 ‘우연’이라는 요소가 혹자에게는 어불성설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들은 우연성이라는 성질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그들의 메시지를 전한다. 우연하게 발생한 것을 예술로 받아들일 때, 예술가들의 메시지 또한 당신에게 와 닿게 될 것이다.

*플래시몹: 웹사이트의 접속자 폭증을 뜻하는 ‘플래시 크라우드’와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사회적 문제에 참여하는 군중을 뜻하는 ‘스마트 몹’의 합성어

 

이재은 기자 jenjenna@yonsei.ac.kr
일러스트레이션 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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