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한국의 이웃, 새터민을 만나다


“두만강의 물이 차가운 것도 느끼지 못했습네다. 고향을 뒤로 하고 중국으로 떠날 때, 살아야겠다는 마음 하나만 있었습네다. 목숨을 걸고 도착한 중국은 북한과는 너무도 달랐습네다. 난생 처음 ‘자유’가 주어졌고, 함께 탈출한 친구들은 처음 맛보는 자유에 취하고 술에 취해 방탕하게 살기도 했습네다. 그러다가 중국 공안에 잡히는 날이면……. 어휴. 말도 마십시오. 잡힐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하루하루 살다가 남조선으로 오는 방법을 알았습네다. 다시 한 번 목숨을 걸었습네다. 여기 온 사람들, 다 그런거이요.”

한국교육개발원 탈북청소년교육지원센터 김영미씨가 설명한 탈북 경로는 대략 이러하다. 말 그대로 목숨을 내걸고 밟은 이 땅에서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초등학생의 순수함을 간직한 22세 새터민

“슨생님, 엄마가 포도 가져오셨는데 먹으러 갔다 와도 돼요?” 탈북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대안학교인 ‘두리하나국제학교’의 교무실에서는 천진한 목소리가 들렸다. 교무실장 윤동주씨는 교무실에 들어온 학생을 가리키며 “학생들이 초·중등 과정을 배워서 그런지 나이에 맞지 않게 어려 보인다”고 말했다. “16살 정도 됐나요?”라고 묻자 교무실의 선생님들이 크게 웃는다. 23살이란다. 천진함은 나이보다 배움의 정도에 따라 결정되는 걸까.

'두리하나국제학교'에서 새터민들이 미술수업을 하고 있다.

윤씨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모범생”이라며 초등학교 과정을 배운다는 22살의 전아무개씨를 소개했다. 전씨도 아이 같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순수함이 묻어있는 얼굴과 달리 그가 걸어온 인생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전씨의 코리안드림은 남한 땅을 밟으면서부터 꺾이기 시작했다. 남한에 와서 처음으로 접한 곳은 다름 아닌 국정원이었다. 평범한 탈북자인지 간첩인지 확인하는 작업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전씨는 국정원에서 조사를 받으며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고 했다. “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고 하니깐 그쪽에서 많이 무시하더라고요. 저한테는 상처인데 학교 안다니고 뭐했냐고… 거짓말탐지기를 가져온다느니 북한으로 다시 보낸다느니 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새터민의 상당수는 전씨처럼 북한에서 초등교육도 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중국에서 평균 3년, 오래는 10년 정도 떠돌이 생활을 하기 때문에 남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나이가 찬 경우가 많다. 따라서 많은 새터민들이 한국에서 공부를 시작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전씨처럼 학교를 다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전씨는 법조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간직한 채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어는 외래어가 많고 북한 사투리와 달라서 말을 하기 전에 위축되고 남을 의식하게 된다”고 했다. 이는 대부분의 새터민이 겪는 고충이다. 탈북청소년교육지원센터 김영미씨는 새터민들이 ‘학교문화’에 익숙지 않아 적응을 어려워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즉, 새터민들은 책상에 진득하게 앉아있는 것과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것, 그리고 외국어는 물론 남한말을 하는 것조차 어려워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중국에서 느꼈던 ‘공안에 잡힐 수 있다는 심리적 위축감’이 남한에서 무한경쟁의 스트레스와 겹쳐 심적으로 힘들어 하기도 한다. 

북한에서 가졌던 직업이나 자격증은 남한에서는 일절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대다수의 새터민들은 이른바 3D업종에 종사해야만 한다. 전씨는 “정부에서는 배우지 못한 새터민들에게 단순노동을 하도록 권유하는 것 같다”며 “처음 남한에 도착했을 때 국정원이나 하나원*에서 제대로 조사를 해 새터민들이 쉽게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밝혔다. 새터민들이 당장 돈을 버는 것보다 장기적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교육을 받는 게 더 좋은 것 같다며.

 

새터민과 선생님들이 함께 밥을 먹고 있다.

우리 곁에 우리의 모습으로 다가온 새터민

 

군계일학. 우리대학교 새터민들은 일반적인 새터민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정도의 위치를 가지고 있다. 피나는 노력 끝에 명문대 학생이 된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우리대학교에 재학 중인 강아무개씨는 “통일부장관이 되고 싶다”며 당차게 꿈을 밝혔다. 새터민 대학생들은 겉으로 보기에 일반적인 남한 학생과 다르지 않았다. 기자가 참여한 우리대학교의 새터민동아리 ‘통일한마당’의 정기모임에서는 20대 남녀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식사를 하는 내내 그들은 20대 특유의 재기발랄함과 생기를 뿜어냈다. 함께 볼링을 치며 즐거워하던 그들은 우리네 친구, 그 모습이었다.

그러나 밝게만 보이던 새터민 중 상당수는 정부와 학교의 재정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많지도 않은 정부의 지원이 그나마 줄어드는 추세에 있기 때문이다. 강씨는 집안에 보탬이 되고자 근로장학생으로 일하지만 그것으로 생활비를 충당하는 것이 어려워 다른 아르바이트도 구하고 있다고 했다. “주위에 저보다 어려운 사람들이 많아요. 겉으로 표현은 안하지만 공부하면서 생활비도 마련하고 부모님 약값까지 대는 학생도 있어요.” 학력 공백이 크기 때문에 진도를 따라잡는 것도 어려운데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공부할 시간을 뺏기는 것은 학교생활에 치명적이라는 게 이아무개씨를 비롯한 새터민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이씨는 소위 SKY대학에 들어왔지만 중도에 탈락하는 학생이 50%는 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재정적 어려움과 학업 스트레스가 주된 원인 중 하나다. 학업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학교 차원에서 마련한 지원도 아직 개선이 필요하다. 영어를 어려워하는 새터민을 돕기 위한 외국어학당의 경우 이용률이 높은 편이지만, 하나튜터링 등의 멘토링 사업은 아는 사람도, 이용하는 사람도 적다.

통일한마당 정종훈 지도교수(신과대?기독교윤리학)는 “우리대학교 새터민들은 통일 한국에서 활약할 수 있는 큰 잠재력이 있기 때문에 입학허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재정적인 이유 또는 학업의 어려움 때문에 그 잠재력의 반 이상이 좌절하고 있는 것이다.

 

꿈은 실현될까요

 

고학력 취득에 성공한 한 마리의 학들은 이제 코리안드림을 실현할 수 있을까. 탈북청소년교육지원센터 김영미씨는 “그렇게 생각하세요?” 라고 되물었다. 김씨는 “명문대를 졸업하더라도 북한출신이라는 것을 밝히면 서류전형에서 떨어지는 것이 부지기수”라고 했다. 밝히지 않더라도 면접에서 말투 등을 듣고 새터민인 것 같으면 뽑지 않는다고도 했다. 김씨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북한에 대한 고정관념이 확고한데다 남한의 기득권자들이 그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 아니겠냐고 조심스런 추측도 덧붙였다.

취업을 준비한다는 리명수(가명)씨가 느끼는 바도 그와 같았다. 그는 “취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능력”이라고 했지만 “인사부 담당자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새터민이라는 타이틀’이 근본적 문제라는 느낌을 받았다”는 말도 했다. “직업은 열심히 살다보면 자연히 따라오는 거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하며 웃던 강아무개씨의 소망이 이뤄지려면 새터민 개인의 노력은 물론 한국사회의 인식변화가 바탕이 돼야한다.

두리하나국제학교 윤동주씨는 “통일은 이미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휴전선이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북한에 고향을 둔 새터민들이 이미 남한 사회에서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민간차원에서의 통일은 시작된 것으로 봐야한다는 설명이다. 이 말은 기자의 심금을 울릴 만큼 진실돼보였다.

통일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우리의 반쪽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어쩌면 남한 땅을 밟을 때부터 시작됐을 그들을 향한 남한인들의 ‘다른 시선’은 청소년 시기를 지나 대학생이 돼도 존재한다. 남한학생들의 새터민에 대한 무관심 역시 통일한국을 사는 우리가 지양해야할 태도다.

취업을 위한 스펙에만 빠져있기보다 역사적이고 민족적인 사안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 통일을 준비하는 세대인 남과 북의 대학생이 해야할 일이 아니겠냐는 이아무개씨의 말을 듣고 남과북의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겠다고 느낀 것이 비단 기자만의 생각이었을까.

 

김정현 기자 iruntoyou@yonsei.ac.kr
자료사진 두리하나국제학교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