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살아있는 정치사(史) 이만섭 동문(정외·50)을 만나다.

‘정관의 치(治)’란 태평성대를 일컫는 말이다. 이는 당태종 이세민의 통치로 중국 역사상 가장 융성했던 시기를 뜻한다. 당태종에게는 위징이라는 신하가 있었다. 그는 황제의 눈치를 보지 않고 200여 번이 넘도록 직언을 했다고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직언은 탁해지기 쉬운 권력을 경계해 왔다. ‘Mr. 쓴 소리’의 원조, 전(前) 국회의장 이만섭 동문(정외·50)을 연희관 이만섭 홀에서 만났다.

지난 2004년 16대 국회를 끝으로 정치권을 떠난 이 동문은 8선 국회의원인 동시에 국회의장직을 2번이나 역임한 한국 정치계의 원로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형형한 눈빛과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건강관리 비결을 알려달라고 하자 “양심을 지키고 잠을 편히 자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부정한 일을 하면 잠자리가 편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우문현답이다.

1950년 우리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그는 캠퍼스의 낭만을 즐길 새도 없이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듣는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는데 편안하게 공부한다는 것은 내 마음이 용서하지 않았어요. 우선 나라부터 지켜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휴학을 하고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한 그는 조종사를 꿈꿨고 4학년으로 진급할 때 생도대장을 맡게 된다. 하지만 졸업을 앞두고 생도들과 행정장교들 사이에 충돌사건이 발생하면서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동기들을 위해 혼자 책임을 졌어요. 군부회의를 받고 퇴교했죠.” 그 후 지난 1953년에 복학한 그는 낯설어진 학교에 정을 붙이기 위해 응원단장을 했고, ‘털보단장’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국회에 와서도 연고전이 있을 때 단상에 올라가 도와주기도 했어요”라고 말하는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대학 졸업 후 동아일보에 입사한 그는 군사정부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터진 일이 바로 ‘필화사건(筆禍事件)’이다. 당시 윤보선 전 대통령이 “군사정부는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해야 한다”고 발언한 내용을 보도한 것이 문제였다. “다른 신문들은 겁이 나서 작게 다루거나 쓰지 않았어요. 하지만 나는 사실보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1면에 당당하게 썼어요.” 그날 밤 그는 육군형무소에 갇히게 된다. “해명기사를 쓰면 풀어주겠다고 했는데 거부했어요. 내 성격이 허락하지 않았던 거죠.” 필화사건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악감정이 생겼을 법도 한데 몇 년 후 그는 신문기자 생활을 청산하고 공화당에 입당한다. “박정희 의장을 만나면서 점점 그가 민족의식, 자립경제, 자주국방의 소신이 확고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 분이 대통령을 하면 나라가 바뀌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권력의 끄나풀이 된 적은 없었다. 오히려 공화당 안에서 소신 있는 발언을 하다가 당원 제명위기는 물론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까지 했다. 삼선개헌 반대가 그 절정이었다. 당시 대통령 4년 중임제였던 헌법을 개정하기 위한 바람이 불었고 그는 역풍의 한 가운데 섰다. “5·16이 구국혁명이라면 대통령이 헌법을 지켜야 맞는데 삼선개헌을 한다는 건 독재하겠다는 얘기밖에 더 되겠어요? 끝까지 반대했지.” 그가 주먹을 불끈 쥔다. “부정부패의 책임자인 이후락 비서실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퇴진도 요구하다 결국엔 대통령 눈 밖에 났어요.” 한 마디로 찬밥신세가 된 것이다. 같은 공화당원들도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9년간의 정치적 박해 속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던 모습은 오늘날 그를 꼿꼿한 정치인의 표상으로 만들었다.

“시민들과 학생들의 힘이었어요.” 지난 87년 6월 항쟁을 떠올리며 그가 뱉은 첫 마디였다.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기 위해 이한열 열사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면서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세간에 떠돌았다. 그 시기 직선제로의 개헌요구에 대한 정치권의 동향은 어땠을까.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표는 고민했어요. 그래서 한 명씩 만나서 직선제를 막을 순 없다고, 역사의 죄인으로 살고 싶냐고 말했죠.”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내기 위해 핵심 인물들을 만나 설득했던 것이었다.

50년 정치인생의 정점은 국회의장 재임기였다. 14·16대 국회의장을 지낸 그는 국회의장에 취임하자마자 “날치기는 없다”고 공언한다. “청와대의 눈치를 보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14대 때는 신년 예산안과 안기부법·통신비밀보호법 개정 등과 관련해서, 16대 때는 자민련을 위해 교섭단체를 10명으로 낮추는 안건을 통과시켜 달라는 대통령의 요청이 있었죠. 안 된다고 했어요.” 헌법상 3권 분립이 보장된 우리나라에서 올바른 국회를 만들기 위해서 그는 국회의장부터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봤다. 국회는 여당도 야당도 아닌 국민의 국회라는 것이 평소 지론이었다. “사회봉을 칠 때 한 번은 여당을, 한 번은 야당을, 마지막은 방청석을 통해 국민을 바라보면서 친다는 게 내 소신이에요. 여야 의원들이 아직도 날 좋아하는 건 올바르게 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두 대통령은 인간적인 서운함을 느껴서인지 그를 연임시키지 않았다.

이쯤 되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직언을 서슴지 않고서도 최장수 정치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정치와 사랑은 계산해선 안 돼. 상대의 경제력을 재면서 결혼한다면 필경 파경을 맞는다고. 정치 또한 마찬가지에요. 권력에 아부하면 장관 자리 한번 하고 끝이거든요. 바른 소리를 하니 정권이 바뀌었어도 나를 필요로 했던 거예요.” 소신이었다. 자신이 속한 당보다는 국민과 나라를 먼저 생각한 그의 정치신념으로 어느새 8선 국회의원에 국회의장을 2번이나 맡게 된 것이었다. 그는 이를 연세정신에서 찾았다. “우리대학의 교훈은 ‘진리’와 ‘자유’입니다. 진리는 부정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양심, 남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자유는 곧 국가와 사회질서를 먼저 생각한다는 말이에요.” 

그는 최근 세종시 문제로 시끄러운 정치권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지적했다. “국론이 분열돼 여야대립은 물론 여당 내에서도 대립하면서 굉장히 혼란스럽다”며 순리대로 할 것을 주문했다. “국회에서 해결해야 할 내용을 가지고 국민투표를 언급하는 건 의회민주주의를 무시하는 처사예요. 국회에 제안을 해서 표결을 통해 수정안으로 가든지 원안으로 가든지 결정해야죠.” 그는 이어 지도자들에 대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오바마가 힐러리를 중용한 것처럼 대통령도 박근혜 전 대표와 만나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하면 되지요. 대통령의 리더십도 문제고 박 전 대표의 독선·아집도 문제예요. 약속을 지키는 건 좋은데 국가가 물에 잠기게 생겼는데.”

권불십년(權不十年)의 한국정치판에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이 동문의 정치역정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주위 사람을 포옹하고 다양한 이해관계를 포용해야 하는 정치인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다. 대화와 타협이 사라지고 상호불신으로 점철된 오늘날 한국정치에서 유난히 그의 ‘쓴 소리’가 그리워진다.

 

글, 사진 정석현 기자 remijung@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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