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주 박물관 '수을관'

유례없는 전통주 수출의 증가, 막걸리 칵테일의 등장…. 얼마 전까지 양주보다 ‘저급한 술’ 취급을 받던 전통주의 인기가 국내외에서 날로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전통주에 대한 인식이 본격적으로 바뀐 계기 중 하나가 일본의 막걸리 붐에 기인한 것이라는 점은 안타깝다. 우리 손에 쥐어진 보물의 가치를 모르고 있다가 남이 알아본 후에야 깨닫게 된 셈이다. 이러한 전통주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 ‘수을관’이란 별칭을 가진 전주의 전통주 박물관을 찾았다.

우리 ‘술’의 매력을 알리는 ‘수을관’

한옥마을을 가로질러 수을관 앞에 섰다. 박물관이라는 이름에서 오는 딱딱한 이미지와는 달리 푸근한 인상을 주는 목조의 한옥 건물이다. 아담한 공간 안에는 전통주 유물전시관,  발효실, 상품관이 오밀조밀하게 들어찼다. 거나하게 취한 모습을 하고 있는 『취화선』의 최민식과 『취권』의 성룡 사진 모형을 지나 마당을 걸었다. 달큼한 술 냄새와 함께 오래된 건물에서 풍기는 나무향이 은은하게 느껴진다.

주방으로 가까이 갈수록 진해지는 술 냄새에 점차 쌉싸래한 계피향이 더해진다. “이건 모주(母酒)라는 전주만의 전통술이에요.” 주방에 들어서자 이지현 연구팀장이 모주를 만들다 일어서며 말했다. 자줏빛이 감돌고 언뜻 봐도 걸쭉해 보여 이게 술인가 싶다. 모주는 막걸리에 각종 약재를 넣고 다시 끓여 알코올 도수가 거의 없다시피 한 ‘웰빙주’라고 한다. 전주에서는 콩나물 국밥과 함께 먹으면 속이 시원히 풀린다고 예부터 인기가 많았다. 최근에는 일본으로 수출까지 되고 있다.

다양한 전통음식을 자랑하는 전주는 막걸리로 유명하다. 풍류를 즐기는 고장의 정서와 넓은 평야에서 나온 풍족한 쌀 덕분이다. 현재 전주에서 영업 중인 막걸리 집은 100여개 정도로 주로 ‘막걸리 골목’에 모여 있다. 이 연구팀장은 “일본에는 전주 막걸리 골목을 찾는 패키지 여행상품까지 있고, 내년까지 전주 막걸리 19억원어치가 수출된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조선시대 우리나라 3대 명주로 꼽혔던 ‘이강주’도 빼놓을 수 없다. 이강주는 배, 생강 그리고 울금이라는 전주 특산 약재가 들어간 전통소주다.

가장 널리 퍼진 것은 평양의 감홍로니 (…) 그 다음은 전주의 이강고(梨薑膏)니 배즙과 생강즙과 꿀을 섞어 빚은 소주입니다. 그 다음은 전라도의 죽력고니 (…) 이 세 가지가 전날에 전국적으로 유명하던 술입니다.
『조선 상식문답』 중

이강주의 맛을 보니 달달한 것 같으면서도 알싸한 향이 일품이다. 25도라는 도수에 비해 독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 연구팀장은 “전통주는 꽃이나 과일 향기와 같은 깊은 향취가 있다”며 “옛날 문헌기록 그대로 재현한 술은 그 향 때문인지 많이 마셔도 정신을 놓을 정도로 취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수을관’의 ‘수을’은 술의 어원으로 추정되는 단어다. 술이 발효될 때 부글부글 끓는 것을 보고 물(水)에 불이 있다하여 나온 ‘수불’이, ‘수을’을 거쳐 ‘술’이 됐다.

지금 소주는 옛날 '그 소주'가 아니다?

이렇듯 고풍스런 맛을 가진 전통주가 그동안 외면 받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일제와 우리나라 정부가 가양주* 제조를 막으면서 전통주의 명맥이 끊기게 됐어요.” 김지성 수을관 연구사의 지적이다. 일제 강점기에 시행된 주세법으로 각 집안 대대로 내려온 가양주 비법이 끊기게 됐다. 더 심각한 건 해방 이후에도 이전 주세행정을 그대로 이은 정부의 정책이었다. 식량난과 밀주 단속으로 좋은 원료를 구하지 못하자, 저급한 원재료를 속성으로 발효시켜 몰래 술을 빚게 됐다. 이 때문에 전통주는 본래의 맛을 잃고, ‘마시면 머리가 띵해지는 술’이라는 오해를 얻고 말았다.

이렇게 전통소주의 맥이 끊기면서 싼 값에 보급될 수 있는 ‘변형 소주’ 가 나왔다. 이강주와 같은 전통소주가 ‘증류식 소주’인데 반해, 시중의 초록색 병에 담긴 소주는 ‘희석식 소주’다. 김 연구사는 “전통소주와 시중 소주의 차이점은 재료와 발효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전통소주는 우리 쌀을 원료로, 우리 누룩** 을 발효제로, 그리고 우리 물을 용매로 빚은 술을 증류해 얻어낸다. 이에 비해 시중의 희석식 소주는 옥수수나 고구마 등의 전분을 원료로 해 배양효모로 발효시킨다. 여기서 얻어진 100%도수의 알코올을 물로 희석시키는데, 경우에 따라 설탕이나 올리고당 등 첨가제도 섞는다. 순수 알코올의 쓴 맛을 없애기 위해서다.

김 연구사는 “들어가는 재료뿐 아니라 만드는 데 필요한 정성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시중 소주와 달리 전통소주를 얻기 위해서는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증류과정을 꼼꼼히 지켜야 한다. 심지어 조선시대에는 술을 빚는 쌀을 위한 논이 따로 있을 정도로 철저히 준비했고, 정갈한 마음가짐으로 담갔다고 한다. 그 당시 제사, 혼사 등에 술이 빠짐없이 쓰여 술이 잘못되면 조상에 대한 불경한 마음을 품었다고 여긴 까닭이다.

소줏고리로 소주를 내리는 장면. 김 연구사는 “은근하게 끓을 수 있도록 세심하게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빚어봐야 참맛을 안다

몸으로 체득해야 기억에도 오래 남는 법. 수을관에는 누룩 빚기, 소주 내리기, 막걸리 거르기 등의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해 제조방식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김 연구사는 소주 내리는 시범을 보이며 “옛 방법 그대로의 전통주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전통주를 빚는 기본적인 과정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술독에는 발효된 쌀과 술이 섞여 있었다. 이 안에 술을 거르는 도구인 용수를 박아서 맑은 술인 청주, 탁한 술인 탁주로 분리한다. 용수는 가늘게 쪼갠 나무를 촘촘히 엮은 것인데, 술이 잘 익으면 틈 사이로 맑은 술이 들어오게 된다. 미리 박아둔 용수 안에는 이미 청주가 들어 차 있었다. 청주를 따라내고 술독에 남은 술지게미를 모아 헝겊에 넣었다. ‘막 걸러 낸다’하여 막걸리라는데, 정말 술지게미를 마구 짜내야 막걸리가 나왔다.

전통소주는 청주를 증류시켜 얻는다. 김 연구사는 소줏고리를 가마솥에 얹고 불을 지폈다. 소줏고리는 커다란 항아리 두 개가 합쳐진 모양의 증류기다. 잘록한 연결부위에 대롱이 아래를 향해 길게 매달려있다. 위 항아리에 차가운 물을 부어 놓으면 아래서 가열된 알코올이 냉각돼 대롱으로 나오게 된다. 끓는점이 낮은 알코올이 물보다 먼저 기화되는 원리를 이용해 높은 도수의 술을 얻는 것이다. 김 연구사는 “증류식 소주는 휘발성의 알싸한 향이 더해져 감칠맛이 나는데다 청주보다 장기간 보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똑똑 떨어진 소주가 모여 어느새 두세 잔을 채웠다. 직접 내린 소주라 그런지 향이 더 그윽하다. 수을관의 설립을 주도한 전통주연구소 박록담 소장은 “우리 술은 향을 즐기기 위한 방향주(芳香酒)지, 취하도록 마시고자 한 술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박 소장은 분별없이 술을 마셔 그 향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요즘의 음주문화를 지적하며 전통주의 보급이 문제 해결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수을관을 나서는데 전시장 한 켠을 채운 각각 다른 색의 술병들이 눈에 띄었다. ‘흰 노을 같다’는 백하주(白霞酒), ‘푸른 파도 빛을 띈다’는 녹파주(綠波酒), 그 이름표에서 조상의 여유로운 풍류가 전해졌다. 점점 마음의 여유가 사라지고 있는 시대에 맛본 전통주는 참맛과 향, 그 안에 흐르는 멋스런 옛 정신으로 더 향기로웠다.

*가양주 : 집에서 고유의 비법으로 담근 술
**누룩 : 술을 만드는 효소가 있는 곰팡이를 곡식류에 번식시킨 발효제

양준영 기자 stellar@yonsei.ac.kr
사진 구민정 기자 so_cool@yonsei.ac.kr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