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오마이뉴스」대표 오연호를 만나다

「오마이뉴스」에서 모든 시민은 기자다. 그 역시도 기자다. 그래서인지 그의 명함에도 오연호 ‘대표기자’라는 직함이 찍혀있다. 새천년과 함께 시작한「오마이뉴스」가 창간한지 어언 10년, ‘기존의 언론 문화와 다른 시민참여형 인터넷 매체를 만들어보겠다’는 그의 실험은 어느 정도 성공한 듯하다. 시민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드는 것은 「오마이뉴스」를 통해 가능성이 입증됐고, 지난 해 촛불집회를 통해 이미 대세로 자리잡았다.

금기사항에 도전하는 기자

우리대학교 83학번인 오연호 대표기자는 원래 소설을 쓰고 싶어 국문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그는 졸업직후인 지난 1988년부터 대표적 민주언론 월간지 「말」에서 기자로 활동했고 지금까지 기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오 대표는 “내가 학교 다닐 당시의 우리 사회는 민주화도, 언론의 자유도, 언론의 통로도 없었기 때문에 사실조차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시대였어요. 그래서 소설을 쓰기 전에, 사실을 바탕으로 한 글을 쓰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죠”라며 기자가 된 이유를 밝혔다.
그의 이러한 신념은 대학시절 대자보나 유인물을 쓰는 것으로 빛을 발했다. 지난 1985년에 ‘6·25때 미군은 무수한 우리 동포를 죽였다’는 내용의 유인물이 전국의 중고등학생들에게 전달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를 두고 경찰 측에서는 유인물의 형식이 마치 연애편지 같다고 해 ‘연애편지사건’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사건의 핵심에 있었던 인물이 다름 아닌 오 대표로, 당시 총학생회 교육부장을 맡고 있던 그는 학생들에게 직접 ‘다정다감하게’ 편지를 썼고 이로 인해 1년간 감옥살이까지 했다. 이 일련의 사건은 ‘시위만 할 게 아니라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메시지를 전달해보자’는 그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기사가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오 대표는 한참을 생각하다 “주로 한미관계에 대해 많이 썼죠”라는 말로 운을 띄우며 ‘미군의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을 꼽았다. 그 후에도 이와 관련해『노근리 그 후』를 비롯한 4권의 단행본을 써냈고 미군에 의해 숨진 사람들에 대한 추적 기사들을 계속해서 써왔다.
그가 이렇게 한미관계에 주목하게 된 특별한 계기는 없다. 다만 그는 “내가 대학 다닐 때 있었던 금기사항에 도전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 금기사항은 바로 북한에 대해 긍정적으로 접근 하는 것과 미국에 대해 부정적으로 접근하는 것이었다.

오연호의 Oh, My News!

그가 금기사항을 건드린 것도, ‘연애편지’를 보낸 것도 모두 사회 내의 균형을 맞추는 작업이었다. 언론 분야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우리의 주류 언론이 보수라는 한쪽 면만 보여줬다면 그 나머지를 보여주는 역할을 ‘대안 언론’이 해야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오 대표는 “그냥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 보폭을 크게 하고 왔다 갔다 하는 일반 언론인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런 일반 언론인은 많잖아요? 나 혼자 뿐만 아니라, 꼭 내가 아니라도 일반 시민들이 나서서 할 수 있는 그런 대안언론을 만들고 싶었어요”라고 말한다.

「오마이뉴스」는 우리나라 언론 환경을 ‘보수가 80%, 진보가 20%’로 볼 때 이를 5:5의 환경으로 바꾸기 위해 만들어졌다. 오 대표는 “분명 5:5로 향하고 있고, 특히 인터넷 공간에서 「오마이뉴스」뿐만 아니라 다양한 풀뿌리 매체들, 개인 블로그들이 하나의 실핏줄을 형성해 연합하면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오마이뉴스」는 ‘열린 진보’를 지향한다. 그렇다고 해서 「오마이뉴스」가 오로지 진보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만은 아니다. “진보의 어느 한편으로 협의한 매체는 따로 있잖아요? 「오마이뉴스」는 스펙트럼이 넓었으면 좋겠어요. 대중적 진보매체랄까. 생산적 논의가 가능한 양심적인 보수와는 손을 잡겠다고 창간철학에 나와 있어요”
앞서 언급했듯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컨셉은 이미 문화화·대중화됐다.  그러나 경제적 자립여부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에 지난 4월부터 매달 1만원씩 정기적으로 구독료를 내는 ‘10만인 클럽’을 통해 그 길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대학생 등록금 문제? 그런 공부도 참 재밌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기성세대들이 20대를 비판적으로 보는 입장에서 그가 바라보는 20대의 모습은 어떨까. 그가 학생일 때는 과잉이긴 했지만 우리 학생들이 ‘이 한 몸 다 바쳐’ 사회를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또 그래야한다는 중압감도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대학생들은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배포가 좀 작아진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얌전해졌다고 해야 하나”
이어 오 대표는 “지나고 보니 대학 4년이 너무 짧더라고. 하루하루를 음미하면서 즐기는 것도 제대로 즐기고 공부도 제대로 해야죠”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는 물음에 오 대표는 즐기되 대학이라는 공간에 함몰될 필요는 없다고 답했다. “대학사회에 나가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생각이 필요해요. 지식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일 수 있는 그 좋을 때를 모르고 흐지부지 지내는 건 너무 아까운 것 아닌가?”

이렇듯 요즘 대학생들 중 흐지부지 대학생활을 하다 자신의 정치적 관점조차 정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있다. 이에 대해 오 대표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봐요. 책들이 전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기도 하고 다양해졌고, 각종 사회 기간에 대해 온갖 포럼들이 많아요”라며 “다음 주부터 「오마이뉴스」에서도 민주주의 교육프로그램이 진행될 예정”이라고 덧붙인다.
그런데 문제의 어려움으로 따지면 예전보다 지금이 더 어렵다. 독재정권 하에선 단순무식하게 학내 비밀경찰을 없애는 문제에만 고민했었다면 지금은 양극화문제, 저출산 문제, 부동산 문제, 비정규직 문제 등 어느 하나 쉬운 게 없다. 그는 “지금은 단지 정치적 민주화만 해결했을 뿐”이라며 “이젠 경제적 사회적 민주화를 해결해야할 때”라고 말했다.
해결방안을 묻자 그는 “정당도 못하고 있는데 그걸 20대들이 하긴 어렵죠”라고 말하며 무엇이 문제인가, 해법을 어떻게 제시하고 있나 하는 걸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공부도 굉장히 재밌어. 대학생등록금에 관한 문제들도 하나하나 공부해야 하는 것이죠”

끊임없이 노력하는 진보주의자

그에게 인생의 최종목표를 묻자 “우리사회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데 기여하고 싶죠. 그게 바로 ‘진보’라는 건데, 그동안은 매체, 글을 쓰면서 기여하고 싶었어요”. 그는 「오마이뉴스」가 지속가능한 모델로 완전히 정착을 하면, 경영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애초에 하고 싶었던 심층 취재 전문 기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국내도 취재를 하고 싶지만 해외를 돌아다니면서 세계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우리 사회의 외국인노동자가 있다면 저 쪽 사회에는 어떤지,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조망하고, 세계 속에서 비교 취재를 하는 거죠.”

그는 등록금 얘기를 하면서도 “프랑스는 등록금이 거의 공짜인데. 왜 이게 안되나, 왜 이게 안되나…”하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와 대화하면서 민주주의에 관한 얘기를 할 때, 사회 문제에 대해 얘기할 때 그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여러번 느꼈다. 대자보부터 시작해 기자생활을 거쳐 「오마이뉴스」까지. 그는 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다시 기자가 될 것을 꿈꾸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었다.

김방현 기자 magnolia@yonsei.ac.kr
사진 정석현 기자 remijung@yonsei.ac.kr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