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는 점진적으로 오기보다 급작스럽게 온다. 수면 아래서 일고 있던 작은 변화들이 어느 시점에 문화적 형태를 갖게 되면 세상을 확 바꾸게 되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학 캠퍼스는 민주화 투쟁의 산실로서 선후배간의 끈끈한 유대와 스터디라는 것이 주도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개성’, ‘자유’ ‘문화’, 그리고 ‘신세대’라는 단어들이 스믈스물 나오면서, 캠퍼스는 개성을 찾는 대학생들로 가득 채워졌다. 고교 3년 입시를 위한 죽은 듯 살았던 그 시간을 보상받아야 한다면서 그들은 배낭여행을 떠났고, 낭만과 꿈을 이야기 했고 다양한 체험과 실험을 통해 사회 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했다.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자기 동료를 만들어냈으며 다양한 문화적 실험과 인터넷 벤처 사업도 벌였다. 학내 팀 작업이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진행된 때였다.

2006년 즈음 캠퍼스는 또 한 번 크게 달라져 있었다. 연구년에서 돌아온 나는 학생들이 아주 명랑하고 어려서 놀랐다. 이들은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 하셨어요.”라는 말을 하였고- 독립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나이인 대학생들은 일반적으로 그런 말을 하기를 매우 꺼린다― 숙제를 꼬박꼬박 잘 해오고 온순했다. 그리고 이들은 ‘스펙’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학점 얼마, 토익점수 얼마, 자격증 몇 개, 해외 연수와 교환학생 경험, 영어 회화 실력과 인턴십 경력 등을 나열하면서 자신의 성능을 증명하기 위해 부지런히 경력을 쌓아가고 계산을 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자기 계발서를 읽으면서 자신의 용량을 키워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란 이들이 컴퓨터처럼 자신의 ‘사양’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자신이 시장에서 팔리는 인재가 되지 않으면 탈락이라는 불안을 안고 있다. 자녀의 미래가 불안해진 어머니들의 기획아래 아주 어릴 때부터 학원과 학교만을 오간 경우일수록 부모가 가진 ‘팔리는 인재’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심할 것이다. 어릴 때부터 학원에 다닌 세대로 특히 2000년 사교육이 합법화 된 이후 이들에게는 학원생활에 더 비중을 두었던 면에서도 이들은 시장이 키운 아이들이다. 선행학습으로 내신 관리를 하고 학원에서 수능 시험 준비를 하며, 고 3이 되면 어머니와 교육컨설턴드의 지도 아래 포트폴리오를 잘 만들어 수시입학을 시도한다. 이를 통과해서 명문대에 입학한 이들은 자신들이 초경쟁사회, 승자독식 사회를 살아가고 있으며 자신은 승자라는 은근한 우월감까지 갖게 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주문을 외우면서 입시경쟁을 내면화한 이들은 어떤 단절도 없이 대학입학과 동시에 ‘즐겁게’ 취업 경쟁에 들어가기도 한다. 사실상 수시를 보기 위해 포트폴리오를 만들어봤던 대학생에게 스펙이라는 것은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이들 중에 통찰력이 뛰어난 학생은 컴퓨터처럼 자신보다 더 높은 사양의 인간이 나오면 곧 폐기 처분되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소모성 건전지'가 아닌 재생 건전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불량과 양질의 재품을 가르듯 시장은 자신을 재단할 것인데 그런 숫자로 평가되지 않은 영역을 찾아서 오래 즐겁게 살아남고 싶다는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목적지가 불확실한 이정표를 향해 무한 질주하는 사람들이 가차 없이 폐기처분되는 후기 근대인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강도 높은 경쟁과 노동을 치르는 삶은 어디서 끝나는 것일까? 불안에 쫓기는 원자화된 개인들은 감히 이런 질문조차 던지지 못한다. 대신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주문을 외우며 타율노동에 몰입할 뿐이다. 그것이 ‘자기 주도적 활동’이라고 우기면서…….

조한혜정 교수(사과대·문화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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