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고, 정갈하고, 다정하면서도 이성적이다.’ 허진호식 멜로에 대해 관객들이 내린 정의다.

허진호 감독은 1998년 『8월의 크리스마스』를 통해 처음 대중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해 『봄날은 간다』, 『외출』, 『행복』 등 다수의 작품을 연출했으며, 지난 10월 8일에 개봉한 『호우시절』까지 매년 1개 이상의 영화를 만들어왔다.

우리대학교 철학과를 나와 전자회사에 잠시 몸담기도 한 그는 대학원을 준비하던 중 ‘영화를 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에 우연히 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가게 됐다. 이렇게 시작한 영화 만들기가 지금까지 어연 10년 동안 이어진 셈이다. 

사람의 인생을 ‘사랑’으로 풀어낸다

영화, 그 중에서도 ‘멜로’라는 장르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허 감독은 “희노애락을 영화로 표현하는 것이 재밌는데 ‘사랑’이 그런 감정을 표현하기에 좋은 장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사랑에 대해 규정하기를 거부했다. “사랑은 이런거다 규정을 하고 가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경우 자신이 규정해 놓은 사랑과 다른 사랑은 이해를 못할 수 있다. 설렐 수도 있고 아플 수도 있고 때론 정 같은 사랑도 존재한다”며 그는 사랑에 대답하기보다 사랑을 하면서 계속해서 질문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영화에 온전히 사랑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한부 사진가와 주차요원의 사랑을 다룬 영화『8월의 크리스마스』는 죽음을 앞둔 사람의 심리와 사랑을 시작할 때 느끼는 정서적인 부딪힘, 가족애 등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냥 반복이 되지 않기 위해

‘허진호 식 멜로’라는 수식어가 있을 정도로 그의 영화 색채는 뚜렷하지만 그는 “꼭 특정한 분위기를 가져가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닌데 같은 감독이 만드니 바라보는 시선, 좋아하는 정서들이 반복해서 나오는 것 같다”며 “조금은 반복된다는 생각도 들고. 새로운 이야기를 새로운 장르로 풀어내고 싶은 생각이 있다”며 다른 장르를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비쳤다. “멜로라는 장르를 고집하진 않는다. 반복이 새로울 수도 있지만, 그냥 반복이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라며 그는 “아직 확실히 정하진 않았지만 기회가 된다면 휴먼드라마나 코미디와 같은 다른 장르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영화가 ‘진짜’는 아니지만…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것도 그의 연출 특징 중 하나다. “비록 영화가 진짜가 아니라 연기를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가공되지 않은 면을 보여주려 노력한다.” 실제로 배우에게 대사를 알려주지 않거나, 씬 전체를 배우들의 애드립으로 처리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영화에 사실성을 가져가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현실과는 또 다른 영화적 사실성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캐릭터들의 감정이나 처한 상황들이 실제 현실에도 존재하는 것이어야 관객들에게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그. 자연스러운 영화적 사실성을 추구하는 그만의 연출법에서 즉흥적이면서도 그 안에 깔려있는 치밀한 계산이 엿보인다.

타고난 영화인, 허진호

“또 다른 작품을 만들고 싶다.” 영화를 한편 만들고 나면 어떤 생각이 드냐는 물음에 돌아온 답변이다. 쉬고 싶다거나 혹은 뿌듯하다 등의 대답을 기대했지만 허감독은 망설임 없이 다음 작품을 준비한다고 말했다.

“작품 제작을 안할 때는 작품 준비를 한다. 영화감독은 일반적인 직업과 달리 일하고 쉬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경우는 일상 속에서도 계속해서 어떤 이야기로 관객들과 소통할까 생각하고 끊임없이 준비를 하는 것 같다.”

이어 “처음부터 영화를 좋아해서 영화감독이 됐다기보다, 영화를 만들면서 점차 좋아진 것 같다”며 “계속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것이 모든 영화감독들의 꿈 아닐까”라고 말하는 그의 말은 영화감독이 천직임을 시사한다.

대학생들이여, 고민하라

이처럼 날 때부터 영화감독이었을 것 같은 허 감독의 대학 시절은 평범했다고 한다. 사진반에 있었지만 동아리 활동을 활발히 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래도 책들은 많이 읽었던 것 같다. 여행도 많이 다니고. 대학교 때 했던 고민들이나 그 당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들이 지금하고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며 대학생들에게 “책 많이 읽고 공부 열심히 하고, 많이 경험하라”고 말한다.

그 당시 했던 고민들이 지금의 영화로 발현되는 것도 있다. 그는 “대학생 때 ‘슬픔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슬픈 감정들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와 같은 고민을 많이 했다. 그래서 내 영화에 나오는 슬픈 장면들에 그 당시 고민이 녹아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연애를 많이 해봤기 때문에 다양한 사랑을 주제로 한 영화들이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물었지만 “연애를 못해봐서 오히려 더 사랑 얘기를 하는 것 같다”며 “젊었을 때 한 사람을 좋아하고, 아파하는 예쁜 감정들이 좋다. 지금 대학생들은 꼭 연애를 많이 하기를 추천한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는 평생을 가져갈 수 있는 중요한 기간이기 때문에 대학교 시절에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고민들을 많이 하길 당부했다.

실제로 만나본 허감독은 그가 연출한 영화처럼 느리고, 정갈하고, 다정하면서도 이성적이었다.

“이번에는 연극을 준비하고 있는데, 편집을 하지 않아 대사가 많고 끊어지지 않는 상황을 연출하면서 관객과 직접 만나고 싶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끊임없이 관객과 소통하기 위한 방법을 연구하고 변화하려는 노력이 지금의 그를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평소에는 게으른데, 영화 만들 때만은 부지런해지더라”고 말하는, 진정으로 영화 만들기를 즐기는 그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글 강형옥 기자 adieu_paresse@yonsei.ac.kr
                                               사진 추상훈 기자  wansonam@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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