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1월에 처음 배우게 된 탈춤은 내게 우리네 전통춤의 고유한 장단을 몸으로 느끼게 해 준 내 생애의 한 획을 긋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 해 무악제 때 정문에서 시작한 길놀이로 축제의 무리들을 노천극장까지 끌어당겨 긴 실타래의 원무로 꼬았다 풀어내며 신명을 돋운 뒤 한 판 제대로 벌어진 탈춤 판에서 흐드러지게 취발이춤을 추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로컬의 흐름 속에서도 끊어질 듯 가늘게 이어져 온 전통적 신명의 끈이 내 삶 속으로 쑥 들어와 나를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사건인 셈이다. 음주가무를 즐기며 제천의식을 행했다는 까마득한 옛 조상님들의 문화유전자가 내게로 이어진 것이다.

그런 나조차도 정확히 인식을 못했던 우리 장단의 고유함을 오히려 외국인 친구들로부터 확인받는 기회가 그 해에 찾아왔다. 세계청소년음악회가 서울에서 열렸을 때였다. 음악을 취미로 하면서도 꽤 수준이 높아 오케스트라를 꾸려낸 친구들이 구미 각국에서 왔다. 연습 외의 시간을 이용해서 한국의 전통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부채춤, 풍물(당시엔 농악), 탈춤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부채춤의 현란함에 환호와 박수를 보내면서도 저 장단은 자기네 문화에도 있다는 반응에 비해 탈춤과 풍물에 나오는 장단은 자기네한테 없다는 얘기를 했다. 자신이 속한 문화의 뿌리를 정확히 알고 확연히 구분해내는 그 친구들 앞에서 부러움과 부끄러움을 함께 느꼈던 순간이다.

몇 년 전 여름방학에 연세리더십센터에서 주관하는 일본, 중국 대학생들과 연세대 학생들 오륙십 명의 모임에서 탈춤을 보여주고 기본춤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아시아여성학회와 아시아소비자학회의 ‘문화의 밤’에서 만난 여러 나라의 학자들도 그랬듯이 이 친구들 또한 나도 놀랄 만큼 열광적인 관심을 보였고, 오히려 함께 했던 우리 학생들이 머쓱해질 정도로 탈과 복색을 걸쳐 입고 사진을 찍으면서 깔깔대는 것이었다. 힙합과 비보이의 춤엔 환호를 보내며 따라해 보려 하지만 우리 전통춤인 탈춤은 대학가에서 중앙동아리조차 존폐위기에 놓인 상황이고 보니, 낯설기는 마찬가지인 일본, 중국 젊은이들의 뜨거운 관심과 즐거워하는 모습에 조금은 뜨아한 표정을 짓던 연대생들의 모습이 그들과 대조적으로 비쳐졌다. 아마 탈춤에 실려 있는 신명을 함께 느껴내지 못한 부끄러움과 푹 빠져드는 그 친구들에 대한 부러움이 서린 표정들이 아니었을까?

대학의 ‘국제화’ 정도를 영어강의를 늘리고 외국인 교수 학생을 유치하는 수치로 가늠하는 추세인 모양이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통번역을 아무리 잘 한 경우에도 한 로컬의 언어를 또 다른 로컬의 언어로 바꾸어내는 정도가 대개 70-80 % 라고 한다. 거의 완벽하다는 경우가 그렇다. 하물며 보통의 경우가 대부분인 선생들이 역시 보통의 경우가 대부분인 학생들과 모국어인 한글로 축적돼 온 숨결과 정서를 굳이 영어로 호흡하려 한다는 것이 과연 수업의 질을 보장할 수 있을까? 그저 영어로만 수업을 하면 국제화인가?

각 분야마다 한 두 명 씩 그 분야를 아우를 수 있는 영어권의 선생들을 초대하자. 기왕이면 한국과 학생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진 사람이면 좋겠다. 그래야 로컬과 로컬이 당당한 가슴으로 만나는 진정한 글로벌의 장에서 글로컬한 소통이 제대로 시작되리라고 본다.

하필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이 한글날이라고 해서 한글의 우수성을 내세우려는 생각은 없다. 어떤 언어도 그 언어권 사람들의 삶의 지혜가 축적되고 의미를 담아내어 소통의 수단이 되는 만큼 우열의 잣대로 눈금을 매길 수도 필요도 없다는 생각에서이다.

김진욱 우리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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