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플을 ‘정상화’한다는 표현을 듣게 되면 자연스럽게 무엇이 정상화된 채플인지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우리대학교 채플이 지향하는 바는 수강생들이 ‘진리와 자유’라는 건학이념에 기초한 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지고 변화된 삶을 살며, 더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연세인으로서 세워지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고려해 볼 때, 학교의 사명과 교회의 사명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채플의 ‘정상화’는 채플의 ‘예배화’와 구별돼야 한다.

사실, 주장되고 있는 채플정상화는 채플예배화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채플의 예배화는 비기독교인 수강생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채플은 수강생들이 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진 연세인으로 성장하는데 도움을 주는 과목이다.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목적이 있는 과목이 아니다. 그런데 예배의 형식이 더욱 갖춰진다면 비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개종의 압박으로 다가와 비기독교인 수강생들로 하여금 들으려는 자세를 취하지 않게 만들 것이다. 듣는다는 것은 단순한 소리의 들림을 의미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주의 깊게, 이해하려는 노력을 가지고 듣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들음이다. 그렇게 들었을 경우에만 말씀이 수강생들이 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지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즉, 채플의 지향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강생들에게 거부감을 가져오는 예배의 형식은 지양돼야 한다. 과연 온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어색한 분위기에 당황하는 많은 학생들 속에서, 소수의 예배하는 학생들에게만 예배받기를 원하시는 분인가? 마하트마 간디는 “예수는 좋지만 기독교는 싫다”고 말했다. 예수의 사랑의 가르침과 현존하는 기독교의 모습사이의 모순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비기독교인들이 채플을 통해서 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질 수 있도록, 그런 들음이 가능한 분위기가 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할 것이다.

김은진(신학·08)

 

현재 우리대학교 채플은 그저 시간때우기 식이다. 이런 분위기를 바꾸고자 얼마전에 연기연(연세대 기독학생 연합회)에서 채플살리기 운동을 진행했다. 채플시간은 자유시간이 아니라 예배시간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홍보물을 나눠주고 앞으로 채플시간에 성실히 임하겠다고 다짐하는 서명도 받았다. 좋은 시도였지만 이런 방법은 소수 기독교인에게만 적용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 아쉽다. 여전히 대다수의 학생들이 채플시간을 개인의 자유시간으로 보내고 있다.

그렇다고 채플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자세만 비판할 것이 아니다. 채플의 방식에도 문제가 있음은 분명하다. 비기독교인에게는 강요되는 '예배'는 폭력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인에게 채플은 '예배'가 아니다. 게다가 이런 ‘예배’를 받는 하나님은 얼마나 민망해하실까. 기쁘지 않다는 기분을 드러내면서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명목하에 매주 같이 시간을 보내는 자녀를 보는 부모의 기분이 어떨지 생각해보라. 결국 채플은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고 어느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이제는 거꾸로 생각해 볼 때가 왔다. 채플을 꼭 기독교인, 비기독교인 학생들이 같이, 그것도 강제적으로 들어야 하나?

우선 당당한 복음의 선포(비기독교인들 눈치보지 않고)로 ‘은혜와 감동’이 있는 진정한 예배가 돼야한다. 더불어 비기독교인을 위한 채플도 신설돼야 한다. 채플이 더이상 이들에게 예배일 수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이 시대 가운데 연세인으로 지녀야 할 진리와 자유, 사랑의 정신을 배울 수 있는 채플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렇게 기독교인, 비기독교인으로 규정지어버림으로 오히려 더 폭력적이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말해주고 싶다. 이도저도 아닌 채플이라면 아예 ‘자율화’로 돌리라고. 도대체 언제까지 미적지근하게 시간을 때우는 자리가 되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이은경(경제·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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