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정 한국YMCA전국연맹 간사

사람을 제물로 받치는 희생제례는 제단도 필요없이 다만 돌려 쳐죽이는 것일 때가 많고 오늘날 남아있는 원시사회에서는 희생양제례의식을 하지 않기에 그 기원과 양상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남성통치기간이 시작되고 나서(기원전 3,000년전) 희생양을 통해 공동체의 죄책감을 해결해 갈등을 해소하고 집단을 통합하는 방식의 하나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무한경쟁, 승자독식의 정글에서 고독한 호랑이가 되건 쓰레기를 주워 먹는 하이에나가 되든 생존만이 중요하다. 나의 생존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번제물이 되게 하는 문화가 "나만은 할 수 있어" 혹은 "나만 아니면 돼"라는 예외주의와 버무려져 우리 문화에 교활하게 자리잡고 있다.

대학 축제에서 이런 냄새를 맡았다면, 내가 지나치게 예민한 것일까? 등록금으로 인한 1만명의 대학생 신용불량자들, 생활고와 삶의 무의미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젊은이들, 등록금 내려고 빌린 사채를 갚지 못해 성매매로 내몰리는 젊은이들이나 이제는 축제조차 돈이 없어 폼나게 즐길 수 없는 이 시대의 대다수 가난뱅이 대학생들은 ‘루저’이며 무가치한 생명들이기에 별다른 의식 없이 죽임을 당하는 희생번제물이다. 내가 신용불량자도 아니고 자살하지도 않았고 성매매에 내몰린 것도 아니며 축제만큼은 여유있게 즐길 수 있지만 또 앞으로 나는 그런 불행에서 예외가 될 것이 분명하지만 그 공포감과 상실감은 쉽게 벗어던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속죄양이나 번제물을 선택하는데 어떤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니 모두 긴장해야 한다).

인도의 평화활동가 A.J.Muste에 따르면, 사람들 사이에는 서로에게 기대하는 행동이나 가치의 기준, 즉 ‘준거’가 있다. 대학인들이 만든 자기 축제의 준거는 무엇일까? 타인의 고통에 기대어 집단의 통합을 이루는 고비용 행사? 희생양이 느꼈을 슬픔과 고통을 잊기 위한 광란의 밤? 성실한 산업예비군으로써 재충전하기? 트렌드에 충실한 소비자로써 자기 욕구를 남김없이 배설하는 것? 준거는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이는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혹은 ‘내 정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Muste의 다음 얘기를 옮기면, (준거가 아니라) 자신 안에 존재하는 창조성을 작동시켜서 신선하고 근원적이며 자발적인 무엇인가를 함으로써 자기 삶의 효율성을 추구해야 한다. 굳이 누군가, 무엇인가를 카피하지 않더라도 자발성에 근거해서 신선한 방식으로, 내면의 성찰을 통해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축제는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며 무엇보다 속죄양이나 번제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류는 지난 100년간 자본과 진보라는 폭력의 대양을 떠도는 보트피플처럼 살아왔다. (사실 나 자신은 문명에 대한 냉소와 절망으로 절여졌지만) 누군가 우리를 평화와 생명의 기슭에 내려주기를 소망하고 있다. 돈의 지배를 단절시킬 수 있는 가치의 모색을 기다리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새로운 것은 새로운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게다가 자신이 살아갈 사회를 상상하고 리모델링 계획을 세우는 것은 모든 젊은이들의 특권이다.

그래서 축제가, 나의 정체에 대한 진지한 성찰에서 계획되고 거대한 상상을 실험하는 판이 된다면 잠시나마 우리는 생명과 평화의 땅에 발을 디딘 느낌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축제가, 자본의 지배와 진보의 강박으로 신음하는 외부와 자유롭고도 본질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대학을 경계 없이 이어주는 시간이 된다면 우리는 잠시나마 인간화된 사회와 가치를 편안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이혜정 한국YMCA전국연맹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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