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낸 『입시전쟁잔혹사』라는 책에서 강준만은 한국의 대학입시일은 ‘계급전쟁의 날’이라고 말하고 있다. 처음 ‘학벌주의’를 제기한 『서울대의 나라』에서만 해도 학벌의 문제는 특정 대학이 사회적 부와 명예, 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에 대한 문제에 집중돼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강준만과 같은 합리적 자유주의 지식인들까지도 학벌이 본질적으로 ‘계급문제’라는 인식에 다가가고 있다.

‘학벌없는사회’는 처음부터 학벌이 계급을 형성하고 지배와 차별을 정당화하는 본질이라고 말해왔다. 학벌주의는 단지 소수 대학이 누리는 특권 문제가 아니며 바람직하지 않은 사회문화 현상으로만 바라봐서 될 것도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학벌은 계급과 권력과 자본의 사회구조화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 의식과 제도의 총체다.

만약 ‘학벌’이 ‘사회적 명예’ 같은 것이라면, 단지 어느 나라에나 있는 ‘명문대 졸업장’과 마찬가지라면 유독 이 나라에서만 벌어지는 잔혹하고 광적인 경쟁을 설명해 낼 수 없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학벌은 대학졸업자들이 얻는 ‘학력자본’만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강력한 상징자본이며 사회자본이며 향후의 경제자본까지, 개인이 취득할 수 있는 최대의 자본이다. 그래서 전 사회구성원들이 이 계급 자격을 얻기 위해 피나는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학벌체제는 계급의 획득과 유지, 세습이 ‘교육 과정’을 통해 정당성을 획득하는 시스템이다. 12년간 모두가 함께 달린 경주에서 자신의 노력을 통해 이긴 것이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탁월함을 증명했다는 논리가 승자의 지배와 권력 독점에 사회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런 학벌체제 하에서 교육은 오직 입시를 목적으로 한 '입시 교육'이 될 수밖에 없다.

20대 초반에 주어지는 한 번의 기회가 평생의 운명과 신분을 결정하기 때문에 한국의 사회구성원들은 이 시기 모든 자원-시간과 노력, 특히 부모의 돈-을 동원해 학벌 취득에 목숨을 건다. 이 과정에서 이미 탈락하는 하층계급의 삶은 물론 경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는 중산층의 삶도 과다한 사교육비와 정보전쟁 속에 망가지고 만다. 매일 혹독한 학습노동에 시달려야 하는 학생과 자원을 지원해야하는 부모들도 말할 수 없이 피폐해져 자신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학벌’은 사회구성원 전체를 노예화한다.
현재의 교육적 파행은 학벌을 해체하지 않고선 어떤 '제도'를 가져와도 개선할 수 없다. 원인이 '학벌'에 있기 때문에 해결책도 '학벌'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학벌체제를 해체하는 방법은 현재의 대학서열을 철폐하는 것으로, 우리는 이를 '대학평준화'라 한다. '대학평준화'란 획일화나 하향평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입시성적으로 결정되는 현재의 대학 서열을 허물어 대학이 교육과 연구라는 본래의 일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해 대학을 대학답게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지난 ‘계급전쟁’의 승자였는지도 모르고 -혹은 패자일지도- 이제 입시전쟁은 과거의 무용담으로만 생각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당신의 청년기를 감금하고 말살했던 입시전쟁잔혹사는 다음 세대로 다시 이어질 것이고 다음 세대의 전쟁, 즉 당신의 아이들이 치르게 될 전쟁은 곧 당신의 장년기를 옭죄는 사슬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학벌없는사회 운동은 당신을 필요로 한다. 당신의 특권을 뺏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를 이 잔혹한 인질극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더 이상 교육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교육을 제 자리로 돌려놓기 위해서다.

채효정 학벌없는사회 사무처장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