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가장 조용하게 오는 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너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나는 너와 전쟁을 했었다. …(중략)’ 시 「내 사랑은」 중에서

1969년 『월간문학』에 시 「불면」, 「하늘」이 당선되며 등단한 문정희 시인. 『어린 사랑에게』, 『남자를 위하여』 등을 내놓으며 우리나라 여성시 계보에 큰 획을 그은 그녀는 지난 2008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가 주최한 제28회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상 문학 부문에 선정됐다. 수상한 소감이 어떠냐는 물음에, “우리 시대 최고의 스타였던 신성일 배우가 특별상을 수상하셨는데, 그 분과 함께 상을 받으니 ‘나도 출세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웃는다.

행운의 얼굴을 하고 찾아온 불운

시를 쓰게 된 계기를 물으니 문 시인은 사춘기 시절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린다. “옛날 설화 중에 강물에 던져진 바리데기가 살아난 것처럼, 믿고 따르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외로운 환경이 시를 쓰는 데는 오히려 비옥하고 아름다운 환경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문 시인은 고등학교 시절 각종 문예상을 휩쓸 뿐 아니라 시집 『꽃숨』을 발간한다. 그러나 문 시인은 그러한 어린 시절의 문학 활동에 대해 “그것은 본격적인 문학이라기보다는 추억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말한다. “그 시절의 행운으로 대학 또한 쉽게 입학했지만, 어린 시절의 쓸데없는 조명과 허명은 문학의 관점에서는 행운의 얼굴을 하고 온 불운이었죠.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제대로 된 시인으로 살기 위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노력하게 된 것 같아요.”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다

문 시인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을 깊이 고민한 시인이다. 문 시인이 그러한 생각을 갖게 된 배경에는 합리적인 지식인이셨던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아버지는 여자인 저도 오빠들과 똑같이 교육받게 하셨어요.” 이와 같은 아버지의 배려로 여성이 제대로 인정받지도, 교육받지도 못 했던 1950~60년대에 고등교육을 받은 문 시인은 여성이 대접받지 못하는 당대 사회현실을 시에 반영한다.

‘학창 시절 공부도 잘하고 / 특별 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 /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 / 합격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가 / … (중략)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 / 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을까 /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시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중)

문 시인은 시대·사회 비판시 뿐 아니라 사랑시에서도 여성의 솔직하고 직설적인 목소리를 드러낸다. 이러한 문 시인의 등장에 1970년대에는 그 이전의 정서적이었던 여성시의 어조가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어조로 전환된다.

문학의 현실, 현실의 감정

문 시인의 시는 직설적이고 선정적이다. ‘오지 않는 사랑을 갈구하며 / 나는 오늘도 러브호텔로 들어간다’ (시 「러브호텔」 중) 그녀의 시를 읽다 보면 시의 솔직함과 대담함에 끌리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시인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에 문 시인은 “문학 속 현실일 뿐”이라고 답한다. “예를 들어 「한계령을 위한 연가」라는 시는 겨울날 폭설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갇히고 싶다는 시였어요. 그런데 나는 폭설 뉴스를 보고 그 시를 썼거든요. 문학 속 팩트(fact)를 현실에 대입해 따진다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다는 얘기. 물론 그렇다고 시 속의 감정들을 모두 거짓이라고 할 순 없죠. (웃음)”

시만 쓰지 않는 시인

문 시인은 자신 내면에 감정 뿐 아니라 타인의 감정에도 관심을 가졌다. 조선시대 문학적으로 탁월한 기량을 보였지만 기생이라는 이유로 조명 받지 못했던 기생들의 시를 모아 엮어 발행한 『기생시집』이 대표적이다.

“조선 선비들이 남긴 시조가 4천수, 기생들이 남긴 시조가 90수인데 그 90수의 시가 4천수의 시를 능가할 정도로 탁월해요. 양반 선비들은 취미 생활로 시를 썼지만 기생들은 자신의 인생을 걸고 했기 때문이죠.” 문 시인은 바로 가부장적 가치관이 깊이 뿌리내린 조선시대에서 기생이라는 사회적 타자로서 살아갔던 여인들의 가슴 속에 있는 슬픔과 외로움을 본 것이다. “가슴 속 슬픔과 외로움은 시가 쓰일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을 조성한 셈인데, 그런 시들을 문학사 밖으로 쫓아낸다는 것은 한국 문학사의 큰 손실이죠.”

문 시인은 시 뿐 아니라 시극, 소설, 수필 등 다양한 문예 활동을 했다. “시는 상징과 비유로 얘기하지만, 그것으로 도저히 표현이 안 되는 감정은 산문 문학으로 얘기해요.” 2년 간 뉴욕에서 유학한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그 대표적인 예다. “뉴욕이라는 자유분방한 공간에서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유학생 여자의 이야기인데, 지금 생각해도 그 소설이 좋아요. 한 사랑이 지나면 남자는 추억을 갖는데 여자는 상처를 갖는다는…” 추억에 잠긴 듯 한 문 시인의 눈가가 촉촉해진다.

전부를 건 사랑을 해라

“알밤인가 하고 조약돌도 주워보고, 솔방울도 주워보고…” 사랑시가 많은 문 시인에게 연애에 대해 묻자 뜻밖에도 이런 대답이 나온다. “이것저것 주워 봐도 아무것도 없다는 거죠. 필생의 연애를 한 번 해보고 싶지만… 100% 불행해지고 상처가 남을 걸 알기 때문에, 두려워요.”

그러나 문 시인은 “나는 두려웠지만 여러분은 전부로 사랑하길 바란다”고 전한다. “진짜 사랑을 했다면 상처가 끼어들 여지가 없겠죠. 하지만 한 가지 경고하자면 사랑은 그 유효기간이 너무 짧은 것 같네요.”

문 시인은 “오늘 장미를 따세요”라고 말한다. 내일 핀 장미는 오늘의 장미와 다른 장미이므로, 오늘이 생애 최고의 날이라는 문 시인. 강의가 없는 이번 학기에는 학교 강의에 쫓겨 밀쳐둔 많은 책들을 읽으며 보내고, 남은 에너지는 다시 창작에 쏟아 꽃피우고 싶다는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만발해있다.

문해인 기자 fade_away@yonsei.ac.kr

사진 추유진 기자 babyazaz@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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